[김부복의 고구려POWER 24]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영웅’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렸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쓰러져가고 있었다. ‘구국의 영웅’이 절실했다. 

신채호는 ‘영웅과 세계’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른바 ‘한일합방’을 앞둔 1908년에 쓴 글이다. 

“영웅은 세계를 창조한 신성(神聖)이다. 세계는 영웅이 활동하는 무대다. 만일 상제(上帝)가 세계를 창조한 이래 영웅이 하나도 없었다면, 망망한 산과 들은 새와 짐승이 울부짖는 폐허가 되었을 따름이다. 창창한 바다는 고기들이 출몰하는 장야굴(長夜窟)이 되었을 따름이다.… 영웅이 없고 세계만 있다면 조물주가 눈을 들어 바라봄에 처연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채호는 같은 해인 1908년 ‘을지문덕(乙支文德)’이라는 책도 집필했다. 나라를 구할 ‘영웅’의 출현을 거듭 강조했다. ‘풍전등화’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 나라의 강토는 영웅이 몸을 바쳐 장엄하게 한 것이며, 한 나라의 민족은 영웅이 피를 뿌려 보호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신은 산과 같이 서 있고 그들의 은택은 바다와 같이 넓다.… 일본인들은 (몽골의 침략을 물리친 것을) 수백 년 동안 역사에 올려놓고 소설을 지어 전하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불러 영구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팔로 국토를 세워 정돈하고 한 칼로 백만의 강한 적을 죽여 무찌른 진정한 영웅의 전적도 없애버렸으니….”

신채호는 이렇게 안타까워했다. 역사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을 찾아가며 ‘을지문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절규했다.

“다행이도다, 을지문덕이여. 몇 줄의 역사가 남아 있도다. 불행이어라, 을지문덕이여, 어찌 서너 줄의 역사밖에는 남지 않았는가.” 

이 책의 서문을 쓴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는 이렇게 보탰다. 

“워싱턴이 있은 후에 허다한 워싱턴이 있으며, 나폴레옹이 있은 후에 허다한 나폴레옹이 있거늘, 우리의 을지문덕은 20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 책이 처음이니 어찌 슬프고 부끄럽지 아니한가.” 

알다시피, 수나라 양제(煬帝)는 고구려를 정벌한다며 무려 113만의 대군을 동원했다. 겁을 주기 위해 200만이라고 부풀렸다. 그 군사의 행렬이 자그마치 960리에 달했다. ‘물경’ 400km나 되었다.

양제는 기세등등하게 자기들이 ‘요동성(遼東城)’이라고 부른 고구려의 ‘오열홀(烏列忽)’을 겹겹이 포위했다. 그 많은 군사가 ‘군홧발’로 밟아도 어렵지 않게 점령할 만했다. 

양제는 그러나 엉뚱한 짓을 했다. 그냥 밟아버리지 못하고, 각 부대에 ‘수항사자(受降使者)’를 배치한 것이다. ‘수항사자’는 글자 그대로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사자였다. “우리가 너희를 공격하려고 하니, 혼나기 전에 빨리 항복하라”는 식이었다. 

수나라가 고구려의 항복을 서둘러서 받아내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고구려가 ‘유격전술’로 수나라의 보급로를 곳곳에서 끊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급에 차질이 생기면 그 많은 군사들을 굶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113만 대군도 ‘하루 군대’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수나라 군사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머나먼 원정길에 지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이를 꿰뚫고 있었다. 양제가 원하는 대로 ‘거짓 항복’을 해주기로 했다. 스스로 위항사자(謂降使者)가 되어 적진으로 들어가서 ‘피골이 상접한’ 수나라 군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다. 

을지문덕은 그러면서 적군을 유인했다. 하루에 7번을 싸워 7번을 져주기도 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적장인 우중문(于仲文)에게 유명한 시(詩) 한 수를 써보내기도 했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아졌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그치기 바라노라(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우중문은 착각하고 있었다. 을지문덕의 군사와 싸워 ‘연전연승’한 것을 자신의 능력 덕분으로 착각한 것이다. 결과는 엄청난 참패였다. ‘살수 싸움’에서 30만5000명이나 되는 군사 가운데 생존자가 2700명에 불과할 정도로 참패하고 말았다. 

‘살수 싸움’은 을지문덕의 위대한 승리였다. 고구려의 위대한 승리였다. 단 한판의 싸움에서 99% 이상의 적을 섬멸한 것은 세계 전쟁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랬으니, 그들에게는 ‘살수’라는 강 이름 자체가 치욕이었다. 그래서인지, 훗날 살수의 이름을 ‘혼하(渾河)’로 바꿔버렸다. 

‘혼하’의 ‘혼(渾)’은 ‘군사(軍)들이 물(水)에 빠졌다’는 뜻이다. 살수대첩에서 잃은 수나라 군사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명분이었다. 

그 ‘혼하’는 지금도 만주벌판을 흐르고 있다. 따라서 살수는 북한에 있는 청천강일 수가 없다. 살수를 청천강이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의 영역을 남쪽으로 ‘1000리’나 축소하는 셈이다. 

그들은 을지문덕이라는 ‘공포의 이름’마저 부정했다. ‘을지(乙支)문덕’이 아니라 ‘울지(蔚支)문덕’ 또는 ‘위지(尉支)문덕’이라고 우겼다. 중국이나 선비족 출신인데 고구려로 귀화한 사람이었다고 떼를 썼다.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을지문덕’으로 남아 있는 한 치욕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이 망했을 때, 나라를 잃은 조선 사람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흩어져야 했다. 하지만 연해주의 조선 사람들은 비록 남의 땅에 있더라도 나라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5대 기념일’을 정해서 지켰다. 

①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승전일인 7월 8일 ②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승전일인 7월 28일 ③ 단군이 나라를 세운 건국기원절인 10월 3일 ④ 단군왕검의 탄신일인 5월 2일 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8월 29일 대욕일(大辱日)이었다.

‘대욕일’은 오늘날의 ‘국치일’이었다. ‘대욕일’이 되면 일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5대 기념일’ 가운데 ‘살수대첩 승전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남 장흥에서 ‘물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올해는 7월 26일부터 8월 1일까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는 소식이다.

행사 중에 ‘살수대첩 거리 퍼레이드’가 포함됐다. ‘물싸움 퍼레이드’라고 했다. ‘시원한 물줄기와 물폭탄이 쏟아지는 행사’라고 한다. 만주의 ‘혼하’에서 열렸더라면 싶은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7일 전남 장흥군 일대에서 ‘장흥 물축제’ 참가자들이 살수대첩 거리 퍼레이드를 즐기고 있다. Ⓒ정남진장흥물축제추진위원회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