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문화재가 남긴 역사의 흔적, 문종대왕과 사도세자(=장조) 태실

[논객칼럼=김희태] 태실과 관련해 앞서 소개한 예천 용문사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장소 중 명봉사(鳴鳳寺)가 있다. 정조 때 왕의 일기인 <일성록>을 보면 정조 24년(=1800년) 3월 22일에 명봉사(鳴鳳寺)의 승려 봉관(奉寬)이 “명봉사는 태실(胎室)을 수호하는 사찰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앞서 용문사처럼 명봉사 역시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그 명맥을 이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내문을 보면 명봉사는 헌강왕 때인 875년 두운(杜雲)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나 여느 사찰이 그러하듯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중건된 것으로, 소백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소백산 명봉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예천 명봉사, 대웅전 뒤쪽의 봉우리 정상에 문종대왕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문종대왕 태실이 자리한 봉우리 정상 Ⓒ김희태

현재 명봉사에는 문종대왕과 사도세자(=장조)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에 찍힌 명봉사 사진을 보면 사찰의 경내에 명봉사 문종대왕 태실비(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87호)와 명봉사 사적비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태실지에 대한 발굴조사 및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태실지에는 웅장한 느낌을 주는 장태석물과 태실가봉비를 마주할 수 있다. 단, 전제해야할 점은 태실에 있던 태항아리는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지금의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명봉사에 있는 두 태실은 석물만 남아 있는 태실지로, 사실상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실제 태실을 보기 위해서는 고양 서삼릉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 태실비의 숨은 그림 찾기, 문종대왕 태실비

명봉사에 문종대왕의 태실이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조 8년(1784) 9월 15일의 기록을 보면 역대 왕들의 태실의 위치와 관련한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문종대왕(文宗大王)의 태봉은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에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문종대왕태실비의 앞면에 “문종대왕태실(文宗大王胎室)”이 새겨져 있어 명봉사에 문종대왕의 태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태실의 앞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보통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나 “문종대왕태실(文宗大王胎室)”처럼 묘호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해당 명문을 통해 태실비가 세워진 시기를 특정할 수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문종대왕 태실, 태실을 봉안한 장태석물과 태실가봉비가 남아 있다. Ⓒ김희태

즉 “문종대왕태실”이 새겨졌다는 건 해당 태실비가 세워진 것이 문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통 묘호는 왕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계승한 다음 왕에 의해 묘호가 붙여졌기 때문이다. 실제 문종대왕태실의 뒷면을 보면 “숭정기원후일백팔년을묘구월이십오일건(崇禎紀元後一百八年乙卯九月二十五日建)”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종)를 의미한다. 실제 융릉(隆陵)에 세워진 현륭원비를 보면 사도세자가 태어난 해를 “숭정기원후일백팔년을묘(崇禎紀元後一百八年乙卯)”라 적고 있는데, 이는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썼지만, 여전히 왕실이나 양반들의 상당수가 숭정기원후라고 해서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종대왕 태실비의 앞면 “문종대왕태실(文宗大王胎室)”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태실비의 뒷면, “숭정기원후일백팔년을묘구월이십오일건(崇禎紀元後一百八年乙卯九月二十五日建)”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융릉에 자리한 현륭원비에서도 “숭정기원후일백팔년을묘(崇禎紀元後一百八年乙卯)”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희태

이러한 연호를 통해 문종대왕 태실비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있는데, 숭정 원년은 1628년이기에 위의 명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보면 숭정 원년으로부터 108년 뒤인 을묘년에 해당한다. 즉 이를 역으로 환산해보면 영조 때인 1735년(=을묘년) 9월 25일에 태실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주상전하태실”이라 새겨진 경우 왕이 승하한 경우보다 생전에 태실비가 가봉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예를 들어 보은 순조 태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의 경우 앞면은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 뒷면은 “가경십일년십월십이일건(嘉慶十一年 十月 十二日建)”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가경 11년은 1806년으로, 태실비가 세워진 시기가 순조가 재위하던 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양 서삼릉 태실에 자리한 문종대왕태실 Ⓒ김희태

보통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 태실가봉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때 왕의 태실이 봉안된 지역은 승격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보여주듯 <조선왕조실록>에서 문종의 태실이 봉안된 뒤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이 유지되는 동안 관리가 되었을 태실은 역설적이게도 나라가 망한 뒤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옮겨지게 되고, 석재는 파괴된 채 태실비만 간신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종대왕의 태실은 현재 명봉사 대웅전의 뒤쪽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앞선 예천 용문사의 문효세자 태실과 폐비 윤씨의 태실과 비교할 때 이정표와 안내문이 잘 되어 있어 찾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또한 예전에 명봉사 경내에 있던 문종대왕 태실비 역시 태실지로 이동해 복원된 장태석물과 함께 자리하고 있어, 태실의 옛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역사의 현장으로 주목해볼 만하다.

■ 사도세자 태실비가 명봉사 사적비로 탈바꿈한 이유는?

종종 강의를 진행할 때 수강생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바라볼 때, 현재의 시각이 아닌 과거의 시각으로 봐야한다”라고 이야기 할 때가 있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는 것처럼 어떤 역사적 사건과 이로 인한 흔적은 반드시 그 이유를 남기기 마련으로, 이러한 현장을 접근할 때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사도세자(=추존 장조, 1735~1762)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데, 인지도로만 본다면 조선 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다. 보통 사도세자를 떠올릴 때 뒤주를 연상하게 되는데, 아버지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1762)의 비극적인 역사는 훗날 정조의 즉위와 현륭원의 천봉, 새로운 신도시 수원 화성의 축성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를 부르게 된다.

현륭원의 천봉이 일으킨 나비효과, 수원 화성의 축성 Ⓒ김희태
화성 융릉, “수은묘-영우원-현륭원-융릉”으로 변화했다. Ⓒ김희태

 

사도세자의 신원을 회복하기 위한 정조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우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학교)에 묻혀 있던 사도세자의 수은묘(垂恩廟)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영우원의 천봉을 물색하게 되는데, 이때 거론된 장소가 바로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한 지금의 융릉(*隆陵,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며, 현륭원에서 융릉의 능호를 받음)인 것이다. 이렇게 영우원의 천봉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사도세자는 장헌세자로 높여지고, 영우원은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 규모와 석물은 왕릉보다 더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대표적으로 병풍석을 비롯해 와첨상석 등의 석물은 숙종 이후 가장 화려하게 조성된 특징을 보이며, 일반적인 원(園)에서는 배치된 바 없는 무인석이 세워졌다.

융릉의 무인석, 다른 원(園)에서는 세워진 바 없는 오직 융릉(=현륭원)에서만 볼 수 있다. Ⓒ김희태
융릉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피지 못한 연꽃, 사도세자의 생애를 연상하게 한다. Ⓒ김희태

이와 함께 정조는 현륭원의 천봉과 함께 사도세자 태실에 대한 감역을 명했다. 즉 태실가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통의 경우 왕자나 공주, 옹주들이 태어날 경우 태항아리를 묻고 아기씨 태실비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그러다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를 경우 장태석물과 가봉태실비를 세우는 태실가봉의 절차를 밟았는데, 사도세자 태실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를 입증해주는 유물이 ‘예천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3호)’으로, 명봉사 일주문을 지나 올라가는 길에 자리하고 있다. 이를 풀어보면 “예천 명봉리(문화재의 소재지) +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 사도세자를 지칭) + 태실(사도세자의 태실) + 감역(=監役官, 감역관을 이야기한다. 토목이나 건축 담당 관청인 선공감의 종 9품 관리다. 여기서는 태실 공사를 의미하고 있다) + 각석문(바위에 새긴 글자)”으로, 사도세자의 태실 감역 공사에 동원된 공사 책임자의 이름과 규모 등을 기록한 일종의 공사실명판인 셈이다.

예천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 일종의 공사실명판이다. Ⓒ김희태

참고로 이 때 공사를 담당했던 감역관이 풍기군수 이대영으로, <조선왕조실록> 정조 9년(=1785) 3월 18일자 기사를 보면 경모궁의 태실가봉이 끝난 뒤 통정대부로 올려 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정조는 사도세자 태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일성록> 정조 24년(=1800) 3월 22일의 기록을 보면 명봉사의 스님인 채옥이 사표(四標) 내의 태실에서 집복(執卜: 관리가 토지와 농작물의 상태를 답사해 세금을 매기는 행위)과 산렵(山獵: 사냥)을 금단할 것을 이야기하자, 이에 정조가 받아들여 폐단을 없앨 것을 지시하는 한편 특별히 경모궁의 태봉에 관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세자이면서 태실가봉이 이루어진 사례는 현재까지 사도세자의 태실이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에 효의 관점에서 아버지를 생각했던 정조의 절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사도세자 태실의 전경 Ⓒ김희태
사도세자 태실의 장태석물 Ⓒ김희태

한편 명봉사를 방문할 때 눈여겨봐야 하는 것 중 명봉사 사적비가 있다. 사적비는 사찰의 창건과 중수 등의 기록으로, 여느 사찰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명봉사 사적비가 조금 특별한 건 보통의 사적비와 달리 그 생김새가 다른 것이다. 외형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태실비와 동일한 형태다. 실제 명봉사 사적비는 애초에 사도세자 태실비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도세자 태실비가 명봉사 사적비가 되었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실의 관리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데, 조선왕조가 유지되는 동안 관리가 되던 태실은 경술국치(=1910)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전국의 태실을 파헤쳐 고양 서삼릉으로 옮기게 된다.

명봉사 경내에 자리한 명봉사 사적비, 애초에 사도세자 태실비였다. Ⓒ김희태
사도세자 태실비, 자세히 보면 귀부는 진품, 비문과 이수는 복원이 되었다. Ⓒ김희태

이 과정에서 태실비와 장태석물 등은 파괴된 채 버려졌는데, 이 같은 양상은 비단 명봉사 태실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관리가 되지 않던 태실비는 이후 명봉사 경내로 옮겨졌고, 주지 스님에 의해 비면이 깎여 비문이 새겨진 결과 사도세자 태실비가 명봉사 사적비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가 유지되었다면 있을 수가 없는 훼손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다 사도세자 태실의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명봉사 사적비의 귀부 부분은 태실지로 옮겨지고, 이수와 비문만 복원되었다. 반면 명봉사 사적비의 경우 이수와 비문은 그대로인 반면 귀부 부분은 복원을 한 모습으로, 이처럼 태실비의 숨어있는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

사도세자 태실비의 앞면, 경모궁태실(景慕宮胎室)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태실비의 뒷면, 건륭오십년을사삼월초팔일건(乾隆五十年乙巳三月初八日建)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고양 서삼릉 태실에 자리한 장조의황제태실, 비석에 황제가 새겨진 이유는 고종 때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황제로 추존되었기 때문이다. Ⓒ김희태

이러한 사도세자 태실비의 전면은 경모궁태실(景慕宮胎室)이 새겨져 있는데, 경모궁은 사도세자의 사당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사도세자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태실비의 뒷면에는 건륭오십년을사삼월초팔일건(乾隆五十年乙巳三月初八日建)가 새겨져 있는데, 건륭(乾隆)은 청나라의 황제인 고종(=건륭제)의 연호다. 여기서 건륭 50년을 환산해보면 정조 때인 1785년(=을사년)으로, 3월 초파일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앞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예천 용문사의 문효세자와 폐비 윤씨 태실과 함께 명봉사에 자리한 문종대왕과 사도세자의 태실은 예천의 훌륭한 문화 관광자원으로 손색이 없다. 더욱이 각 태실마다 담긴 이야기와 흔적 등이 담겨 있기에 주목해볼 역사의 현장으로, 예천을 방문하실 때 용문사와 명봉사에 자리한 태실을 관심 있게 보실 것을 권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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