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 1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기획

올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석학으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탄신 250주년 되는 해이다. 다산 정약용은 백성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평생동안 학문연마와 저술에 힘썼던 위대한 학자요 경세가였다. 특히 다산은 조선이 세도정치의 암흑 속에 갇혀 있을 때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면서 독창적인 생각을 제시하고 교훈을 남긴 거의 유일한 ‘스승’이었다. 이에 <오피니언타임스>에서는 시민단체 (사)다산문화교육원의 협조를 얻어 다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를 조명할 계획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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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자(字)는 미용(美庸) 또는 용보(頌甫), 호(號)는 사암(俟菴), 당호(堂號)는 여유(與猶)이다. 부친 압해 정씨(押海 丁氏: 현재 나주 정씨로 불리 움) 재원(載遠)은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晋州牧使)까지 지냈고, 모친 숙인(淑人) 해남윤씨(海南尹氏)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로서 영조38년(1762) 6월 16일 열수(한강의 옛 이름)변의 마현마을(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선생을 낳았다.

15세(1776)에 풍산 홍씨에게 장가드니 무인출신으로 승지와 절도사를 지낸 홍화보(洪和輔)의 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 학문을 좋아하였다. 16세(정조1년, 1777)에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유저(遺著)를 처음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사돈이었던 이벽(李壁)과 매형이었던 이승훈(李承薰)을 통해 서양서적에 접하면서 새로운 과학지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실학(實學)과 서학(西學)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한편, 선생은 관직에 나아가 나라와 백성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과거시험 공부에 열중한 결과 22세(정조7년, 1783)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였고, 이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그 유명한 ‘중용(中庸)에 관한 문답’으로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인정을 받았으며, 드디어 28세(정조13년, 1789)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예정된 대로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청년관료로서 성장해 갔다. 문과에 합격한 그 해에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였으며, 31세에는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華城)을 설계하였고, 33세에는 홍문관 수찬(修撰)에 이어 경기 암행어사(暗行御史)로, 36세에는 곡산부사(谷山府使)로, 38세에는 형조참의(參議)로 활약하면서 그 정치적 상황이 좋을 때나 나쁠 때를 가리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백성을 위한 정치적 개혁을 추구해 나아갔다. 선생이 속한 남인(南人)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선생을 영수로 하여 이가환‧ 권철신‧ 권일신‧ 안정복 등이 중심이 된 개혁세력으로 정조의 개혁정치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와 지주제를 옹호하는 성리학만을 신봉하던 보수집권세력인 노론(老論)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이때 노론은 성리학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서하지 않았고 서학(西學)을 정적을 없애는 빌미로 이용하였는데, 선생도 이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 정승으로 쓰일 큰 재목인 데도 불구하고 유배[29세(정조14년,1790)에 예문관 검열로 발탁되었을 때 노론이 반대하자 그 직을 사양하였는데 왕명을 어겼다 하여 충청도 해미에 10일간 유배되었음]와 좌천[34세(정조19년,1795)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사건의 여파로 정3품 통정대부에서 종6품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음]과 근신[36세(정조21년,1797) 되던 해 6월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젊은 날 서학을 받아들인 것을 반성하는 사직상소문을 올리고 물러나자 곡산부사로 외직에 보내졌음]을 거듭하면서 참고 견디면서 지내다가 1800년 봄에 끝내 형조참의를 사직하고, 처자를 데리고 낙향 (落鄕)하여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은둔하였다.

그 해 여름에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이후 노론(老論)은 11살의 어린 순조를 옹립하고 정순왕후의 섭정아래 1801년 신유옥사라는 천주교 박해사건을 일으켜 모든 정적을 제거한 뒤 세도정치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가 선생의 나이 40세로 셋째 형 약종(若鍾)은 죽고, 우여곡절 끝에 둘째 형 약전(若銓)은 흑산도로 그리고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47세(순조8년,1808) 봄에 선생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茶山:야생 차가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아래에 있는 윤단의 산정(茶山草堂)으로 이주하여 저술 작업에 몰두 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의 학문에 있어 두축을 이루고 있는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필생의 역작인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도 이 시기에 초고가 이루어졌다. 황상(黃裳)‧ 이강회(李綱會)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혜장(惠藏)‧ 초의(艸衣)와 같은 고승들과도 귀중한 인연을 맺었다.

57세(순조18년,1818) 가을에 해배되어 고향 마현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저술을 계속하여 미완이었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했고 경세유표(經世遺表)를 보완했으며 흠흠신서 (欽欽新書) ‧ 아언각비(雅言覺非)등을 저술했다.

75세(헌종2년,1836)의 회혼일(回婚日)인 2월22일 이곳 마현 자택에서 서거하였고 4월 1일 선생의 유언에 따라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안장되었다.

사후 74년만인 1910년(융희4) 7월 18일 조정에서는 선생을 정2품(正二品)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 제학(奎章閣 提學)으로 추증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내렸다.
/(사) 다산문화교육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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