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논객칼럼=이호준] 불면이 깊어지고 새벽마다 잠에서 깬다 했더니, 이별이 눈앞에 있었구나. 하지만 이런 이별을 어찌 이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행복한 이별’ 정도가 되겠구나. 지난 번 집에 간 날은 너와 술 한잔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다. 젊은 시절 삶을 지혜롭게 경영하지 못하다보니, 아비는 여전히 유목지를 떠도느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자꾸 줄어든다. 그 또한 너희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날 새벽에는 엷은 잠에서 깨어, 네가 자고 있을 방문 앞에서 한참 서성거렸다. 머지않아 너를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참 복잡하더구나. 대견함이 앞서지만 어찌 아쉬움이라고 없을까. 이 험한 세상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왜 없을까. 너희들보다 먼저 걸어오면서 얻은 거라고는 고작, 한생을 살아낸다는 게 만만치 않더라는, 냉정한 현실에 대한 자각뿐이다.

그런 깨달음이야 반드시 오래 살았다고 오는 건 아니겠지. 돌아보면 너 역시 평탄치 않은 길을 걸었으니 말이다. 스스로 선택했든 운명이었든, 고난의 길이었다. 너는 자주 흙탕물에 발을 적셨고, 남들이 신작로를 택해 걸어갈 때 굳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나는 그런 너를 보며 숱한 날을 술잔에 기대 살았다. 잡아주려 내민 손도 허공을 움켜쥐기 일쑤였다.

질풍노도라는 말로 덮어버리기에는 바람이 너무 거셌던 날들, 너는 그런 날들을 스스로 헤치고 일어섰다. 먼 길을 돌아 학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고, 험한 직장에 들어가서 눈앞의 벽과 치열하게 싸우고, 어느 날 사표를 던지고 나와서(네 엄마의 불안하던 눈빛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공부에 매달리더니 괜찮다는 기업에 들어가고, 다시 조금 더 낫다는 직장으로 옮기고…. 그 사이에 아비가 한 일이라고는 묵묵히 기다리고 응원한 것뿐이다. 가끔 조언이라는 것을 해주긴 했지만, 그 정도로 어찌 네 앞길에 비단을 깔아줄 수 있었겠느냐.

Ⓒ픽사베이

고마운 일이다. 미리 흔들린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더욱 굳건해진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확인했구나. 아비는 네가 월급 잘 나오는 회사에 들어가서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비틀거리던 날들을 일으켜 세워 스스로 길을 찾아낸 것이 자랑스럽다.

다만 미안한 마음은 여전하구나. 이른바 ‘흙수저’로 태어나게 해서 여전히 흙수저를 들린 채 집에서 내보내는 마음 말이다. 가정을 꾸리는 자식에게 돈 한 푼 쥐어주지 못하는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을까. 그런 환경에서 가정을 꾸려 쿨렁거리며 한 생을 저어온 아비로서는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 나름 애를 썼건만 조금도 흑자를 이루지 못한 삶을 살았구나. 그래서 더욱 네게 고맙다. 단 한 번도 기대나 원망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러기가 어디 쉬웠을까. 친구들의 사는 모습을 뻔히 보고 있을 텐데.

이제 정말 너를 보낼 시간이 가까워졌구나. 아주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네 자신의 가정을 꾸렸으니 ‘품안의’ 자식이 아닌 건 확실하다. 나는 석양 아래 서서 너를 보내지만 너는 이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출발점에 섰다. 흔히 결혼을 제2의 탄생이라고 하지 않더냐?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세태 속에 결혼의 의미도 많이 퇴색됐지만, 타인과 타인이 만나 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 어찌 예사롭기만 하겠느냐. 새로 태어난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정말 소중한 일이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보는 눈을 갖지 못하면 영원히 아침은 오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건 지게를 하나 더 지는 것과 같다. 어깨는 무겁고 허리는 자주 휜다. 권리는 나눠 써야하고 의무는 배로 늘어나는 아주 불리한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한 방향을 향한 꿈을 꾼다는 것은 모든 난관을 덮고도 남는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과정 또한 험난한 길이지만 생애 가장 큰 행복이기도 하다. 행복은 사회 공동의 기억이나 가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이 그리는 그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잔소리가 될까봐 더 이상의 말을 아낀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가정에서든 회사에서든 사회생활에서든. 세상이 자꾸 험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잃기 때문이다. 저 섬나라의 수장이라는 자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이 부끄러운 줄 모르기 때문에 뻔뻔한 얼굴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돈에게 모든 가치를 두고 도리도 예의도 휴지처럼 내팽개치는 세상, 슬그머니 쓰레기를 버리고 남의 주머니 뒤지기를 망설이지 않는 자들이 활보하는 세상이 아비는 슬프다. 맹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염치를 잃지 마라. 조금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고통스럽지는 않다.

아들아, 잊지 말아라. 사랑은 주려고 할 때 비로소 광휘(光輝)로운 것이다. 그 순간에만 행복을 잉태한다. 준만큼 받으려고 손가락을 꼽는 순간, 사랑은 곧 고통을 상징하는 단어가 된다. 결혼을 축하한다. 줄 것이라고는 세월에 젖은 가난밖에 없는 아비가, 비 잦은 세상, 걸음마다 엎드려 징검돌이 되고 싶은 심정으로 축복을 보낸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