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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제 간첩사건’[김부복의 고구려POWER 25]
김부복 | 승인 2019.08.23 10:09

[논객칼럼=김부복]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기 위해 간첩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안보는 ‘철통’이었다. 모조리 체포되고 말았다.

이세민은 고심 끝에 삼불제(三佛齊)라는 나라의 임금에게 거액의 돈을 보냈다. 고구려의 정확한 군사 숫자, 군대 배치, 부대의 위치 등을 정탐해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삼불제는 남해에 있는 작은 나라였다.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우호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삼불제의 사신은 마음대로 고구려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거액 송금’에 넘어간 삼불제 임금은 사신을 빙자한 간첩을 고구려로 파견했다. 삼불제의 간첩은 정탐을 마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며 배를 타더니 뱃머리를 슬그머니 당나라 쪽으로 돌렸다.

고구려의 정보망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고구려 해라장(海邏長)이 삼불제 간첩을 곧바로 체포했다. 해라장은 바다를 지키는 하급 장교다.

해라장은 삼불제의 간첩을 가두고 나라에 보고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아니다. 대적(大敵)을 보고도 치지 못하는 나라에 무슨 조정이 있겠는가.”

해라장은 간첩에게 압수한 ‘기밀문서’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간첩의 얼굴에 먹물로 경고문을 새겼다.

“내 아들 이세민에게 몇 마디 말을 보낸다. 만약 금년에 나에게 와서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내년에는 마땅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寄語我兒李世民, 今年若不來進貢, 明年當起問罪兵).”

해라장은 이렇게 새기고 나서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의 부하 아무개 씀(某書)”이라고 덧붙였다. 해라장은 연개소문을 하늘처럼 받드는 추종자였다.

간첩의 얼굴은 글자로 가득 차게 되었다. 좁은 얼굴에 많은 글자를 새기는 바람에 잘 알아보지 못할 염려가 있었다. 해라장은 똑같은 경고문을 백지에 다시 써서 간첩에게 준 뒤 추방했다.

Ⓒ픽사베이

고구려의 하급 장교 따위에게 조롱당한 이세민은 화가 상투 끝까지 치솟았다. 당장 고구려를 치겠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신하들이 만류했다. 당나라는 대국이지만, 고구려 역시 대국이었다. 쉽사리 들이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사건의 진상부터 규명하자고 건의했다.

이세민은 ‘항의사신’을 고구려로 보냈다. 사신을 맞은 고구려 영류왕은 경고문을 새긴 해라장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잡혀온 해라장은 자기가 저지른 짓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잘못을 인정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구려는 이렇게 바다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648년, 군사 원조를 얻으러 당나라에 갔던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귀국 중이라는 정보가 고구려 수군(水軍)에 입수되었다. 고구려는 즉시 김춘추 체포에 나섰다.

붙들리면 끝장이었다. 김춘추는 수행하고 있던 부하 온군해(溫君解)와 부랴부랴 옷을 바꿔 입었다. 온군해는 고관(高冠)과 대의(大衣)를 걸치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坐於船上).

고구려의 순라병(邏兵)은 온군해를 김춘추로 착각했다. 그 사이에 김춘추는 작은 배로 옮겨 타고(乘小船)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소식을 보고받은 진덕여왕은 온군해에게 대아찬(大阿飡) 벼슬을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상을 내렸다.

당시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한판 승부’를 놓고 국론이 갈라지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화평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당나라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개전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국론은 엇갈렸지만 군(軍)은 하나였다. 연개소문이라는 구심점이 있었다. ‘삼불제 간첩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똘똘 뭉친 군은 ‘세계 최강’인 당나라에도 밀릴 것 없었다.

당나라는 그런 고구려를 깰 재간이 없었다. 결국 이세민은 안시성 싸움에서 눈알까지 잃은 채 쫓겨야 했다.

고구려의 수군은 막강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할 때는 5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고 있었다. 남조 송나라에 말 800마리를 한꺼번에 보낼 정도로 많은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3세기 무렵부터 오나라에 바닷길로 사신을 보낼 만큼 해상 활동도 활발했다. 백제와 왜가 대륙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을 차단할 정도로 강력하기도 했다.

압록강 기슭에는 약 30m 길이로 돌을 가공해서 쌓은 부두시설이 남아 있고, 강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한 보루 2군데가 압록강 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중국 동해안에 ‘수군기지’를 두고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이랬던 ‘바다 장악’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퇴색하고 말았다. 1419년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 정벌’ 직후라고 할 수 있는 단종 1년(1453),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이 임금에게 보고했다.

“평안도와 함길도는 오랑캐가 자주 들어와서 노략질을 하므로 무사를 골라 수령으로 삼고 방비를 엄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나라의 태평이 오래 되자 바다 근방의 백성이 섬이나 포구에 깊숙이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만약 왜구가 틈을 타서 몰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면 주민들이 화를 피할 수 없으므로… 일찍이 뭍으로 옮겨 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바다를 비우자는 ‘공도(空島)정책’이었다. 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조선 말기로 가면서는 아예 ‘제해권 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유는 쉬웠다. 조선의 연안을 통과하는 이양선(異樣船), 서양 선박의 눈에 띄면 ‘침략 야욕’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야간에는 바닷가에서 불빛이 새는 것까지 조심하도록 했다.

바다를 포기했으니 조선술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원양 항해에 적합한 첨저선(尖底船)의 제작이 금지되고 연안 항해나 할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만 남게 되었다.

지금은 또 어떤가. 북한 어선의 이른바 ‘노크귀순’ 사건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게 바로 얼마 전이다.

김부복  news34567@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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