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의 잡문집]

[청년칼럼=시언] 전 세계 인구 중 어떤 식으로든 전기를 공급받는 인구는 몇 퍼센트일까? 20%? 50%? 80%? 찰나의 순간이지만 대부분의 시선은 20%와 50%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80%다. 아프리카 최빈국들을 포함한 전 세계 인구의 80%가 -다소 불안정할 지언정- 전기를 공급받고 있다. ‘생각보다’ 높은가? 그렇다. 한스 로슬링의 책 『팩트풀니스』는 당신이 세계를 바라보던 기존의 관점을 사정없이 ‘팩트폭행’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책을 읽는 당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식한지 낱낱이 지적하는 꼰대류의 책일까 염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반대다. 희망, 내일의 태양, 인류애 같은 감성적인 언어가 아닌, 세상은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팩트’로 확인하는 경험은 지금껏 내 생각이 틀렸음에 감사하게 되는 희한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른바 ‘팩트’의 시대다.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 맞붙은 정치인들은 서로에게 “팩트만 얘기하라”며 언성을 높이고, 각종 예능에선 ‘팩트폭행’이라는 희대의 유행어가 탄생했다. 여기서 팩트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통용되는, 흔들리지 않는 사실’을 뜻할 터다. 헌데 이상하다. 사방에서 이것이 팩트라며 부르짖건만, 순순히 상대가 들이민 팩트에 동의하는 꼴은 본 적이 없다. 팩트가 사실, 혹은 진실을 뜻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유력한 설명은 이거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팩트만을 골라 듣고 발언한다는 것이다.

 “People choose they're fact they want now. (이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사실만을 선택해.)"
- 미국 드라마 <뉴스룸 시즌 1> 中

미디어, 특히 언론에서 들이미는 ‘팩트’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엿 같고 위험한지’를 가리키는 지표들이 절대다수라는 것이다. “2016년 올해 4,000만대의 항공기가 목적지에 무사 착륙했습니다”라는 뉴스 멘트가 “2016년에만 10대의 항공기가 추락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라는 멘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당연히, 1940년부터 항공기 사고 건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왔다는 통계자료도 생략된다. 여기서 언론의 의도는 명확하다. 뉴스 소비자로 하여금 사회와 세상을 좀 더 위험한 곳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까진 ‘역시 기레기들이 문제’라고 뇌까리고 말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언론이 위와 같은 보도행태를 보이도록 등을 떠민 주체는 뉴스 소비자들인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최근 일주일간 포털 사이트에서 클릭한 기사 중 긍정적인 기사가 얼마나 됐는지. 신림동 자취방 성추행 미수 사건처럼 자극적이고 잔인한 기사들이 주를 이루진 않았는가. 언론은 그 활동 영역이 공적 영역에 속할 뿐 엄연한 영리 기업이다. 기업이 생존하자면 돈이 필요하고, 기사 조회수에 비례하는 광고단가는 언론이 돈을 벌 수 있는 몇 안되는 창구다. 언론이 조회수가 잘 나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에 주력하도록 등을 떠민 건 그 기사를 지금껏 클릭해온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극적인 기사에 끌릴까. 한스 로슬링은 부정 본능(The nagative instinct), 공포 본능(The fear instinct), 비난 본능(The blame instinct) 등 인간의 10가지 심리적 본능을 그 이유로 꼽는다. 우리 선조들은 밝고 긍정적인 정보보다는 위협이 될만한 정보에 주력하며 생존률을 높여왔다. 빽빽한 수풀더미를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보단 ‘저기서 사자가 튀어나오면 어떻하지?’라는 의심이 우선하도록 하는 본능이 우리 안에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비해 에이즈 감염자는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는 통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일말의 안심 뿐, 생존률을 높이는 정보로 보긴 어렵다. 그보단, 한 에이즈 환자가 병력을 숨긴 채 무차별적으로 원나잇을 즐긴 ‘에이즈 테러’에 대한 기사 하나가 좀 더 값진 정보로 인식될 수 있다. ‘세상에 미친 사람이 정말 많구나. 조심해야겠다’ 같은 일말의 경각심이라도 심어주니 말이다. 의심하고 비난하고 분노할 여지를 주는 정보에 집중하는 심리. 불안을 야기하는 기사들에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다. 

물론 『팩트풀니스』의 시각에는 맹점도 존재한다. 한스 로슬링 본인도 이런 약점을 인식한 듯 ‘세계에 어떤 개선이나 진보도 필요 없다는 인식은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고 수차례 강변한다. 그럼에도, 문제에 대한 인식과 비판적 토론의 장인 공론화를 통해 진보해온 인류 역사의 전통을 고려해 볼 때 『팩트풀니스』의 긍정주의적 시각은 개선이 필요한 사회 문제들을 외면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팩트풀니스』는 사회와 세계 그 자체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보단 그 사회와 세계를 묘사하는 미디어와, 그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일반 시민들의 심리 매커니즘을 조명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팩트풀니스(사실충실성)적인 시각은 “2016년에만 10대의 항공기가 추락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라는 뉴스 앵커의 멘트에 혼비백산 하는 게 아니라 “2016년 올해 4,000만대의 항공기가 목적지에 무사 착륙했습니다”라는 또 다른 팩트의 변형임을 공평하게 인지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팩트풀니스』는 너도 나도 자신이 팩트임을 자신하는 ‘팩트의 바다’를 무사히 항해하기 위한 좋은 안내서다.

시언

철학을 공부했으나 사랑하는 건 문학입니다. 겁도 많고 욕심도 많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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