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콘스탄틴 게오르규 <25시>(The 25th Hour)

통계의 하나일 뿐이다

소련군이 마을을 점령한 후 곧 인민재판소가 만들어졌다. 의장은 유대인 마르크 골덴베르크였다.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을 노인을 살해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소련군에 의해 인민재판 의장이 된 후 농부의 아내인 아리스티샤를 재판관으로 앉혔다. 판타나 마을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몇년 전에 도끼로 헌병을 죽인 이온 칼루가루도 재판관이 되었다. 세 사람은 마을에서 밥술이나 먹는 농부 8명을 비롯해 그리스정교회의 신부이자 사제인 알렉산드로 코루가에게 교수형을 언도했다. 그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반동분자’였다.

그날 밤 마르크는 마을 사람들 몰래 반동분자들을 끌어내 한 사람씩 목덜미에 총을 한 방씩 쏘아 처치해 버렸다. 아리스티샤와 며느리 스잔나는 시체 구덩이 속에서 목숨이 겨우 붙어 있는 코루가 사제를 구해 철수하는 독일군에게 넘겨주었다. 다음날 아리스티샤는 마르크에게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후 총살당하고, 스잔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소련군에게 붙잡혀 무수히 강간을 당했다. 신의 보살핌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소련군의 아이를 임신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군인은 연합국 1700만, 추축국 530만, 제3국 20만 명이며, 민간인은 2700만 명이 아무런 죄없이 죽었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불가능하지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 동안 5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범한 농부였다가 하루아침에 인민재판소 재판관이 되었다가 그 다음날 같은 편에 의해 총에 맞아 죽은 아리스티샤도 그 중 한명이다. 그녀의 죽음은 분명 비극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이다.”

스탈린의 말에 따르면, 통계 속에 묻힌 5천만 명의 삶을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일이 기억하고, 추모하고, 슬퍼할 겨를은 없는 것이다.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나치의 야욕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번졌다. Ⓒ김호경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2500만 명에 달하여, 유대인은 잔인한 홀로코스트를 당했다. Ⓒ김호경

예쁜 여자를 아내로 두었다면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지도는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아시아는 태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가 일본, 미국, 유럽의 식민지였으며, 현재 50국가가 넘는 아프리카는 4개 나라만 제외하고 전부 식민지였다. 남미도 사정은 똑같았으며 이스라엘, 조지아, 동티모르 등 여러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 몇 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암흑의 제국주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피점령국 혹은 식민지배를 당한 백성들의 삶은 당연히 평화롭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가 가장 큰 목표였다.

루마니아 판타나 마을의 요한 모리츠(Johann Moritz)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가난한 농부 안쿠와 아리스티샤의 외동아들인 모리츠는 어느 날 헌병대로부터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는다. 전쟁이 일어나 말과 식량을 징발해가는 일은 있었지만 “사람을 징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항의하기 위해 헌병대로 간 모리츠는 무어라고 항의의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총검에 휘둘려 엉겁결에 포로 행렬에 끼여 끌려갔다.

무언가 잘못되었으므로 자신은 곧 석방되어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굳게 믿었지만 그 믿음이 현실화되는 데는 13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104곳의 수용소, 감옥, 강제노동 공장을 거쳐야 했다. 그 길에서 만난 것은 무자비한 폭력, 지독한 굶주림, 잔인한 고문, 끝없는 분노, 죄없는 죽음들의 목격이었다. 가장 의아한 것은 평범한 농부이며, 그리스정교의 진실한 신도이며, 국가의 충성스런 시민인 자신이 왜 억류자가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 헌병대 소장 니콜라이는 “유대인과 불온한 인물들을 징발하라”는 명령을 받자 마을의 유일한 유대인인 마르크 골덴베르크와 모리츠를 명부에 올렸다. 모리츠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요한이라는 이름이 혼동을 주었고, 더 큰 이유는 스잔나라는 예쁜 여자와 결혼했다는 점이었다. 모리츠가 끌려간 후 니콜라이는 스잔나를 협박해 이혼장에 서명하게 만든다. 즉 예쁜 여자를 아내로 둔 것이 모리츠의 죄였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온갖 고행의 여정을 시작한다.

모리츠는 가장 잔인한 시대의 가장 운 나쁜 사나이지만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바보처럼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면서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있었기에 전쟁통에 죽은 5천만 명에 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생존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크고,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13년 동안 그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25시>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군이 된 요한 모리츠 역을 맡은 안소니 퀸. Ⓒ김호경

기계노예가 장악한 현대사회

<25시>(La Vingt-cinquième heure)는 1949년에 발표되었다. 작가는 루마니아의 신부 콘스탄틴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이며 1946년 프랑스로 망명해 <제2의 찬스>, <단독여행자> 등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으며, <25시>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28살의 요한 모리츠가 어느 날 갑자기 징발되어 모리츠 야곱, 양켈, 야노스, 쟝 등 여러 이름으로 바뀌면서 겪는 불행과 인생의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의 야욕, 약소국민에의 철저한 탄압, 미국과 소련의 대결, 공산주의의 악랄함, 제도의 모순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해 큰 찬사를 받았지만 이 소설이 진정으로 고발하는 것은 ‘기계문명의 냉정함’이다.

코루가 사제의 아들 트라이안 코루가는 소설속에서 <25시>를 집필하는 작가이다. 그 역시 운명의 장난으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갖은 고행을 겪으면서도 세계인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를 잊지 않는다. 그의 메시지는 때로는 엉뚱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기계노예는, 그것 없이는 하루도 우리가 살아갈 수 없는 무수한 봉사를 해주는 우리의 하인이야. 우리를 위해서 차를 태워주고 광선을 마련해주고, 마사지를 해주고, 라디오 다이얼에 맞추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고, 길을 만들어주고, 산을 헐어주고......... 이렇게 많은 일을 해주고 있어.

즉 기계노예는 완전무결한 하인이다. 그러나 그 기계노예들이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 주인공 모리츠는 냉정한 기계노예의 가장 가련한 희생자였으며 우리 모두 기계노예에 몰입되어가는 인간노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25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논객칼럼=김호경] 

루마니아의 신부 게오르규는 전쟁의 참혹함을 치열하게 그린 작가이기도 했다. Ⓒ김호경

* 더 알아두기

1. 게오르규(1916~1992)는 작품을 통해 서구문화의 모순을 철저히 비판하고 동양문화와 사상을 옹호했다. 1974년 한국을 첫 방문한 이후 5차례나 방문했으며 ‘새로운 고향’으로 부를 만큼 사랑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다.

2. 게오르규는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찬가>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수난의 오랜 역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역사의 비참한 패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왕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많은 고통이 또 밀려와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전히 왕자라는 것을….”

3. <25시>는 1978년 영화로 제작되었으며(한국에서도 방영되었다). 안소니 퀸이 모리츠 역을 맡았다. 원작의 내용을 전부 담지는 못했지만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4. 동유럽 국가의 소설은 마렉 플라스코의 <제8요일>, 아이작 싱어의 <적들, 어느 사랑의 이야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를 권한다.

5. 수용소와 홀로코스트를 다룬 소설은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 가르도시 피테르의 <새벽의 열기>, 야마사키 도요코의 <불모지대 1 운명>을 권한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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