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세상읽기]

[논객칼럼=이계홍] 흔히 말하는 오늘의 ‘스카이대학’ 학생들 부모는 전문직, 고학력, 고수익의 강남 3구 출신 아버지들 비율이 단연 높다고 한다. 이들을 일러 이른바 ‘강남 기득권 세력’이라고 말한다. 강남과 강북의 차이는 물론, 지방과는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차이가 나는 계층이다.

그 자식들인 오늘의 대학생들은 그런 부모의 지원을 받아 하늘처럼 높다는 스카이대학에 대거 합격한다. 품질 좋은 교육환경과 특별과외, 입시전문가 뺨치는 고급 교육정보를 습득한 높은 학력 부모들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합격했을 것이다. 지방 중소도시의 교육환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경이다.

조국의 딸도 그중 하나다. 아버지의 뛰어난 머리와 좋은 스펙, 서민이 상상할 수 없는 재정적 지원을 받아 대입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커리큘럼 체험을 통해 ‘특수층 자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정교하게 짜여진 시험 제도’를 미꾸라지처럼 잘 통과해 스카이대학생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아비 조국이 ‘강남 좌파’라는 점이다. 거의 보수 수구화된 강남 아버지들과 달리 이른바 ‘진보 개혁성향’을 갖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영남 출신이 종북좌파 따위의 진보 아이콘'이라니? 모두가 놀라 자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니다. 서구의 진보, 또는 우리가 이빨을 가는 ‘좌파 이념’은 대개 그런 가진 자들이 높은 교육을 통해 습득한 지식으로 전파한 것이니까. 글로벌 기준으로 조국만이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 좌파 철학, 또는 노동자의 실천 이념을 고안해낸 사람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높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인 것이다. 노동자는 그 수혜자일 뿐이다. 우리 풍토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이상하게 볼 뿐이지, 하나도 이상한 풍경이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인간은 출신계급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아주 저급하고도 고약한 인생관들을 갖고 살아가도록 제도화돼가고 있다. 우파는 우파대로 살아야 하고 좌파는 좌파대로 살아야 한다는 기계론적 유물론(조국 교수의 표현이다). 그리고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살아야 하고, 리어카꾼은 리어카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화인(火印) 아닌 화인이다. 인간 삶의 복잡성과 다양한 품성, 개성을 외면하고 출신 성분에 따라 정해진, 박제된 제도에 끼워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방식. 그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구조화되었고, 그 진원지는 알게 모르게 강남과 스카이 대학에 만연해있다. 스카이 대학생들은 벌써 그 아비 세대처럼 ‘특권적 지위와 선민의식’에 젖어있다면 과장된 평일까?

선민의식과 지역의식이 내면화하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아버지 세대의 ‘강남 특권층’이라는 우월적 지위의 세계관을 상속받았거나 세뇌된 아이들. 상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매사를 이념과 빈부와 지역 기준으로 보고, 편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고 틀 안에서 이익의 개인화와 책임의 사회화로 몰아가는 자세. 아픈 사회를 치유하는 희생적 지도자 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스카이대학 대학생들에게서 위기를 느끼는 것은 위와 같은 잔상들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가장 미천한 자에게 손을 뻗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는 것이다”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낡은 계몽주의로나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소외받고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는 것이 유치하다고 보는 시각. 여전히 사회불평등 구조 속에 차별이 당연시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구조화되었는데도 “그놈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차별의식. 인간에 대한 따뜻한 품성을 냉소하는 이기적 삶의 태도. 사회적 합의나 공동체의 공동선을 귀찮아하며 “니네들이나 뭉치든지 말든지 해. 우리는 우리의 세상이 있거든?” 하는 오만한 모습. 한 세기 가까이 한반도를 침울하게 쪄눌러왔던 분단문제도 “핵실험이나 하는 개새끼들과 무슨 대화냐” 라며 북을 상대하기도 싫다는, 냉전 체제로 이익을 챙겨온 아비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적대 의식. 그리고 알게 모르게 보수언론의 제작 멘탈에 세뇌되어 편견과 오만을 체화한 청춘들. 이런 진단이 지나친 편견일까?

보수언론이 자기들 입맛에 따라 편파 왜곡 보도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재인을 두들겨 패고 조국에 대한 비난도 과도함을 넘어 식상할 정도다. 왜 그럴까. 가치보다 이익 우선이라는 제작태도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그들의 이익을 담보해준 정치세력이 아니다. 그래서 이익을 함께 해온 보수정권에게는 어떤 구조적 비리나 부정에도 관대하다. 언론이 정론의 가치를 차버리고 이익 때문에 적대적이고, 우호적인 편가르기 기준점에 서있으니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데 조국은 다르다. 그는 이상사회를 꿈꾸는 미래의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최소한 ‘천박한 강남 기득권’을 거부하면서 반칙없는 공정한 국가 틀, 나쁜 권력을 수선하자고 외쳐왔다. 그런데 자녀 대입과 관련해 강남 기득권과 똑같다는 프레임에 갇혀 지금 그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당연히 들을 수 있는 비난이다. 이중인격자로 치부될 수 있다. 낡은 유제를 청산하자고 해놓고 그들과 똑같은 행보를 하니 ‘더 나쁜놈’이라고 욕을 먹는다.

그의 행동은 때묻은 기득권과 차별이 안된다는 사회적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개혁의지를 꺾기 위해서 끌어내리려 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되는 세력이 꺾으려 하니 더욱 동의해주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물러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진실로 사회대변혁의 신호탄을 올리기를 바란다. 돌파할 수 있는 용기있는, 선명한 사람을 내세워 프랑스가 2차대전 직후 비시 정권 협력자 1만여 명을 처형할 때와 같은 혁명적 기치를 내걸기를 바란다. 우리는 역사가 한번도 제대로 청산된 적이 없다.

그 선봉에 ‘젊은 스카이’들이 나서기를 바란다. 때묻은 기득권의 편에 서지 말고 단호히 순결한 혁명의 깃발을 올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묻는다. 젊은이들이 그동안 문재인정권이나 조국보다 더한 ‘거악’에 침묵해온 이유가 무엇인가. 구정권 시절 정경유착, 특권층 자녀들의 불법 입학과 불법 취업을 지면을 통해 적잖게 보았을 것이다. 반칙 특권이 일상사처럼 지배하며 시민을 좌절하게 할 때, 젊은이들은 무엇을 했나. 그들과 카르텔을 형성한 기득권 아버지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황금 사다리’를 구축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특전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효심이 저절로 우러나서? 그래서 이익의 개인화, 책임의 사회화에 쉽게 물들었다고?

서구 지성들을 보자. 아버지의 자본으로 높은 교육을 받았던 자식들이 아버지들의 철옹성 같은 기득권 구조를 깨고, 서민과 함께 혁명의 깃발을 올리고, 끝내 자유 평등 박애의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젊은이들도 아버지들의 썩은 정신을 딛고 순결한 양심의 깃발을 올릴 수 없는가. 진정으로 나라의 개혁과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없는가.

조국의 딸이 교묘한 입시제도의 허점을 뚫고 입학한 사례가 그에게만 특정지을 수 있는 것인가. 그들 또한 그런 수혜를 받은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자성의 목소리가 없는가. 교육제도의 허점과 모순을 몸소 체험한 세대라면 교육제도 개선의 목소리를 처절하게 낼 수 없는가.

젊은이들은 청년실업 문제 때문에 앞길이 캄캄한 세대라고 고뇌한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세대, 어느 해인들 청춘의 고뇌가 없었는가.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아파하고 고뇌하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다. 오늘의 대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고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의 대학은 대학이 아니라는 비아냥이 있다. 취업을 위해 교수가 성적을 조작해주고, 올 A를 맞춰주면서 어떤 부정도 마다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한 곳이 대학사회라고 한다. 청년취업난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들로 인해 불이익당한 사람들, 손해보는 사람들은 또 뭔가. 조국 후보자를 뒤지고 화를 내는만큼 구악의 구체제와 그들을 뒷받침해준 언론의 행태에 대해선 왜 침묵하는가.

조국 비판이 누구에게 이익을 주는가. 특정 정치세력에게 이익을 주고자 나선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벌써 특정 정치세력이 이익을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세력이 현재의 권력보다 도덕적 측면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는가.

젊은이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아비들의 물적ᐧ인적 지원으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도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는가. 그런데 아버지 세대 못지 않게 구태에 젖었다면 나라의 장래를 어떻게 맡길 수 있는가. ‘스카이’가 타락하면 나라의 미래는 없다.

이계홍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여론독자부 차장

서울신문 수석편집부국장 통일문제연구소장

용인대 겸임교수, 동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객원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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