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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유민 애사’[김부복의 잡설]
김부복 | 승인 2019.09.04 10:45

[논객칼럼=김부복] ‘간도(間島)’는 만주의 드넓은 육지를 말하는데 왜 ‘섬 도(島)’자가 붙었을까.

‘설’이 있다. 조선 사람들이 두만강 이북을 경작하면서 ‘간토(墾土)’라고 했는데 이것이 발음이 비슷한 ‘간도’로 변했다는 설이다. 두만강 한가운데 섬이 있는데 옛날부터 이를 ‘사잇섬’ 즉 ‘간도’라고 불렀다는 등의 얘기도 있다.

아마도 우리 영역을 줄이고 깎으려는 사람들의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땅 간도는 남한 면적의 절반이나 되는 간단치 않은 넓이였다.

조선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곳으로 이주했다. 19세기 초인 1809년 극심한 가뭄이 나라를 휩쓸었다. 그 바람에 ‘산업의 전부’였던 농사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가 되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나라에서 경기도와 삼남지방의 기민(飢民)수를 조사했더니 그 숫자가 무려 839만 명에 달했다. 조선 8도의 총인구 758만 명을 상회하는 ‘희한한’ 통계였다.

Ⓒ픽사베이

조선시대에 발생한 홍수, 가뭄 등 각종 재해는 238회나 되었다고 한다. 백성은 초근목피조차 구하기 어려울 때가 적지 않았다. 살아갈 길을 찾아 만주 땅으로 넘어가는 백성이 많았다.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던 만큼 어쩌면 낯설지도 않았을 것이다. 1860년대에는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발생했다. ‘만주 유민’은 더욱 많아졌다.

나라를 일제에게 빼앗긴 후에는 그 숫자가 더 늘었다. 고향 땅을 잃고 글자 그대로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만주 땅으로 흘러들어야 했다. 1929년 말 현재 간도의 인구는 50만4033명이었다.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38만2405명으로 75.9%를 차지하고 있었다. <日帝下 ‘滿洲國’ 硏究, 尹輝鐸 지음, 일조각>

조선 사람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며 쌀농사를 지었다. 1921년 일본영사관은 다음과 같이 자기들 본국에 보고했다.

“재만(在滿) 한인의 90% 이상은 농민, 특히 수답(水畓) 경작에 종사하는 무식하고 가난한 백성이다. 이들의 생활 상태는 평균 1호당 4인 가족이 수숫대로 3평 안팎의 집을 지어 살거나 중국인의 집 한 칸을 빌려서 생(生)을 이어가고 있다. 수확한 쌀을 팔아버리고 대신 값싼 좁쌀이나 옥수수, 수수 등을 구입해서 주식으로 하고… 더 가난한 자는 조, 수수 소량과 채소에 다량의 물을 넣어서 끓인 죽으로 겨우 끼니를 때워 4인 가족이 한 달에 겨우 4∼5원 정도로 생활하는 자가 적지 않은 실정이다.”

일제는 이런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조선 사람들을 계속 밀어냈다. 심지어는 ‘정감록’까지 인용했다.

“고래로 일반 조선인 사이에는 ‘서간도’, 즉 압록강 우안 일대의 지방을 가리켜 ‘화난(禍難)’을 피하는 곳이라는 미신이 있다.… 조선인 사회에서 널리 맹신되는 정감록이라는 예언서에 ‘삼풍(三豊)’과 ‘양백(兩白)’이라는 것이 나온다. 삼풍이란 압록강 우안의 ‘상풍, 중풍, 하풍’에 해당하고 양백이란 ‘백두산과 장백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 땅은 이미 일본 것이니 ‘화와 난을 피해’ 삼풍과 양백의 땅인 만주로 떠나라는 압박이었다. “너희들이 받드는 정감록에도 나와 있지 않느냐”는 식이었다.

그런 결과 일제강점기 끝자락인 1940년 ‘해외거주 조선인’ 숫자는 261만592명으로, ‘해외거주 일본인’ 255만9136명보다도 많았다. 전체 조선 사람의 10.2%나 되었다.

그렇게 밀려났지만 조선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했다. ‘강제이민’을 당하면서도 나무를 베고 숲을 밀어서 옥토로 가꿨다. 일본 영사관의 보고서는 이렇게 놀라고 있었다.

“그들이 이주하는 곳이면 잡초가 무성한 망망한 황야일지라도 얼마 안 가서 논으로 변하고 과거에는 버려지고 관심도 두어지지 않았던 황무지가 예상치도 못했던 수익을 올려주게 되므로 중국인 지주는 대체로 조선인의 내주를 환영하고 있다.… 그들 농민은 해마다 뼈 빠지게 일하면서 욕심 많은 중국인 지주의 희생이 되어 스스로는 영구히 지주로서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될 희망이 없으며….”

수수깡 집에서 채소와 잡곡을 섞은 죽으로 연명하면서도 쌀농사를 일궈냈던 것이다. 그 추운 ‘고위도의 땅’에서 쌀농사에 성공한 민족은 우리밖에 없었다. ‘피와 눈물의 쌀’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중국 사람들은 ‘동북 쌀’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이 쌀이 우리 입맛에 맞는다며 ‘밥쌀용’으로 수입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쌀의 과거사’를 알고 나면 목이 메어서 넘기지 못할 쌀이다.

이 ‘간도’를 놓고 조선 말 청나라와 ‘국경회담’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 대표 이중하(李重夏)는 목숨을 걸고 버텼다.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어도, 국토는 줄일 수 없다(此頭斷可, 國土不可縮).”

이랬던 ‘간도’였다. 일제가 이른바 ‘간도협약’으로 만주철도 부설권을 받는 조건으로 청나라에 넘겨주기 전까지는 우리 영토였다.

따라서 ‘간도’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땅이다. 이를 위해서는 ‘간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우리 땅이었음을 계속 주장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우리 민족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는 ‘현실’도 세계에 알리는 게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런데 ‘간도’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기존 교과서에 있던 ▲청나라의 협박에도 간도 영유권 강력 주장 ▲간도 농토의 52%는 한국인 소유 ▲(을사늑약 때문에) 현재까지 간도는 중국 영토로 남아 있다는 등의 내용이 ‘국정 교과서’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간도’를 지워버리면 미래 세대는 그곳이 ‘우리 땅’이었다는 '과거사'조차 모를 것이다. 이중하가 지하에서 통곡할 노릇이다. 그래도 9월 4일은 ‘간도의 날’이다. 간도를 돌이켜볼 수 있는 날이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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