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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태실비가 두 개인 이유는?[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9.09.05 11:04

[논객칼럼=김희태] 이제까지 부여를 답사할 때면 백제와 관련한 유적지 답사가 주를 이루었다. 이는 부여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백제의 수도인 사비가 연상될 만큼 백제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충남 금산에 이어 부여를 단시간 방문을 했는데, 이유는 부여에 있다는 선조대왕 태실비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간 인터넷과 논문 등의 자료를 통해 선조대왕 태실비가 부여군 충화면 오덕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과 선조대왕 태실비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해당 논문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태실비를 가봉태실비, 뒤에 만들어진 태실비를 개건비로 칭하고 있다.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에 위치한 오덕사, 이곳에 선조대왕 태실비가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부여 선조대왕 태실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김희태

그런데 선조대왕 태실비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오덕사에 있는 태실비만 소개할 뿐, 또 다른 태실비에 대한 내용을 언급한 기사는 단 하나 밖에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또 다른 태실비인 충화 선조대왕 태실비에 대한 내용을 접했을 때 비지정 문화재라 관리가 안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현장을 방문해보니 이미 지난 2010년 12월 31일에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고, 방치된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제법 단장이 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부여의 선조대왕 태실비를 답사할 때 오덕사에 있는 태실비를 포함해 선조의 태실지인 태봉산, 태봉마을에 자리한 충화 태봉마을 태실비를 함께 보는 것이 좋다.

 

선조의 태실지인 태봉산과 충화 선조대왕 태실비가 위치한 태봉마을의 전경 Ⓒ김희태

이처럼 선조대왕 태실비가 둘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우선 선조의 태실 위치와 관련해 1784년(정조 8년) 9월 15일 자 열성조의 태실과 관련한 위치 기록을 보면 선조의 태실이 임천 서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747년(영조 23년) 3월 21일 자 기록에는 전 충청감사 서종급이 임천군(林川郡)에 있던 선조대왕 태실의 비가 깎여 알아보기 어렵다는 소식을 장계로 올리게 되고, 이에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예조참판 김상로가 앞면에 묘호를, 뒷면에 글자의 마멸로 다시 세웠다는 것을 기록하고 개건비를 세울 것을 주청하게 된다. 이에 영조가 받아들이면서 선조의 태실비가 두 개가 되었던 것이다. 즉 선조 때 최초로 세운 태실가봉비가 있고, 태실비의 앞면 마멸로 영조 때 개건비를 세운 것이 선조대왕 태실비가 둘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태실비, 충화 선조대왕 태실비(부여군 향토유적 제112호) Ⓒ김희태
충화 선조대왕 태실비의 앞면,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충화 선조대왕 태실비의 뒷면, ‘융경사년시월십이일입(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立)’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최초로 세운 태실가봉비의 경우 위의 기록처럼 앞면의 글자가 훼손되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남아 있는 글자를 통해 앞면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 새겨졌음을 알 수 있다. 뒷면의 경우 제법 명문이 잘 남아 있는데, ‘융경사년십월이십일입(隆慶四年十月二十一日立)’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비문에 등장하는 융경은 명나라의 목종(=융경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융경 4년을 환산해보면 1570년(=선조 3년)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최초의 태실가봉비는 선조의 재위 기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개건비의 경우 앞면은 ‘선조대왕태실(宣祖大王胎室)’이 새겨져 있는데, 묘호가 새겨진 것을 통해 최소한 선조가 세상을 떠난 뒤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선조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묘호가 선조가 될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부여 선조대왕 태실비의 앞면, ‘선조대왕태실(宣祖大王胎室)’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부여 선조대왕 태실비의 뒷면, ‘숭정기원후일백이십년정묘오월초삼일입(崇禎紀元後一百二十年丁卯五月初三日立)’, ‘융경사년경오십월이십일소입비자세구각결고개석(隆慶四年庚午十月二十日所立碑字世久刻缺故改石)’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뒷면의 경우 ‘숭정기원후일백이십년정묘오월초삼일입(崇禎紀元後一百二十年丁卯五月初三日立)’이 새겨져 있다. 숭정기원후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신종(=숭정제)의 연호로,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여전히 조선에서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숭정기원후가 사용이 되었다. 여기서 숭정기원후의 시작은 숭정제가 황제에 오른 1628년으로, 이로부터 120년 뒤인 1747년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옆에는 다른 명문으로 ‘융경사년경오십월이십일소입비자세구각결고개석(隆慶四年庚午十月二十日所立碑字世久刻缺故改石)’을 적고 있다. 여기서 융경 4년 10월 20일에 세운 태실비(=앞전 태실비)가 오래되고 어질러져 이에 고쳐 세운다는 의미로, 앞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덕사 경내에 자리한 부여 선조대왕 태실비 Ⓒ김희태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진 선조대왕 태실 Ⓒ김희태

이러한 선조대왕 태실비는 최초 태봉마을에 자리한 태봉산 정상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전국에 흩어진 태실을 현 고양 서삼릉으로 모으는 만행을 저질렀다. 따라서 선조의 태실 역시 이때 옮겨가게 되고, 이후 태실 관련 석물들은 방치된 채 나뒹굴게 되었다. 그러다 마을 주민들에 의해 태실비는 태봉마을과 오덕사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한편 태봉마을에서 만난 주민에게 지금도 태봉산에 선조 태실 관련 석물이 남아 있냐고 물어보니, “어릴 때는 산 곳곳에 석물로 보이는 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지도에서는 태봉산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태양산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 역시 이번 방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혹여 부여의 선조대왕 태실비를 방문하실 기회가 있다면 오덕사의 선조대왕 태실비와 함께 태봉마을의 충화 선조대왕 태실비, 그리고 태실지인 태봉산 역시 함께 주목해보실 것을 권한다.

■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에 자리한 의혜공주 태실(부여군 향토유적 제71호)

현재까지 부여에서 확인되고 있는 태실 관련 유적은 크게 ▲ 선조대왕 태실비(오덕사, 태봉마을 등 2기) ▲ 명혜공주 태실비(현 정림사지 박물관 야외전시장) ▲ 의혜공주 태실비(규암면 함양리, 함양 성결교회로 가는 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부여 규암면 함양리에 소재하고 있는 의혜공주의 태실은 현재 태실비와 태함이 옮겨져 보존이 되고 있는 상태다. 현재 태실의 경우 고양 서삼릉 경내로 옮겨진 상태로, 의혜공주의 태실과 관련한 유적은 함양리에 있는 태실비와 태함, 서삼릉 태실 구역에 있는 의혜공주 태실로 구분할 수 있다.

함양 성결교회로 가는 길 왼편에 자리한 의혜공주 태실 Ⓒ김희태

의혜공주는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로 1남 4녀 중 둘째다. 남편은 청원위(淸原尉) 한경록으로, 현재 의정부시 호원동에 묘가 있다. 태실비의 경우 마멸이 심해 판독이 쉽지가 않은데, 실제 논문이나 자료 등을 찾아봐도 온전한 명문은 전하고 있지 않다. 앞면의 경우 ‘王女’만 판독되고 있으며, 뒷면의 경우 ‘三日巳時立’이 확인된다. 따라서 해당 내용만으로는 누구의 태실인지 알기가 어렵다. 다행히 태실이 발견되는 과정에서 태지석이 출토되었는데, 해당 태지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황명정덕십육년삼월이십육일인시생(皇明正德十六年三月二十六日寅時生)’, ‘왕녀공주옥혜아지씨태가정이년윤사월삼일사시장(王女公主玉蕙阿只氏胎嘉靖二年閏四月十三日巳時藏)’이다.

 

의혜공주 태실비, 앞면과 뒷면 모두 마멸이 심해 명문의 확인이 쉽지 않다. Ⓒ김희태
태함의 전경 Ⓒ김희태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진 의혜공주의 태실 Ⓒ김희태

해당 태지석의 내용 중 태어난 해를 특정해보면 정덕은 명나라 무종(=정덕제)의 연호로, 정덕 16년을 환산해보면 1521년(=중종 16년)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해당 태실의 주인공이 공주의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장경왕후 윤씨와 문정왕후 윤씨 소생의 공주인 것을 알 수 있는데, 1521년 3월 26일에 태어난 공주를 찾으면 된다. 그런데 이해에 태어난 공주는 의혜공주가 유일하기 때문에, 해당 태실이 의혜공주의 태실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지석을 통해 의혜공주의 이름이 옥혜(玉蕙)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가정은 명나라 세종(=가정제)의 연호로 가정 2년은 1523년(=중종 18년)에 장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정림사지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세워진 명혜공주 태실비(부여군 향토유적 제113호)

​지난날 울진의 성류굴을 몇 차례 방문했는데, 그때는 지나쳤던 8광장(=초연광장)에서 진흥왕과 관련한 명문이 나왔다는 사실을 접할 수 있다. 이후 다시 성류굴을 방문해보니, 그제야 보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부여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정말 수도 없이 방문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제까지는 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주목하다 보니, 정림사지 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을 주목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날따라 야외 전시장에 세워진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형태가 마치 태실비와 비슷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태실비가 맞았다. 해당 태실비의 주인공은 명혜공주.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 숙종에게 누이가 되는 인물이다.

고양 서삼릉 경내에 자리한 명혜공주의 묘, 최초 성남시 수정구에 자리했다. Ⓒ김희태
성남 봉국사,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최초 명혜공주의 묘가 성남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희태

 

그런데 현종은 조선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었고, 때문에 자녀는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숙종과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등 1남 3녀 밖에 두지 못했다. 이 가운데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어린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장성한 자녀는 숙종과 명안공주 밖에 없었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공주를 떠나보낸 현종의 심정을 알 수 있는데, “심사가 막히고, 혼미하다”며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미 공주들의 혼약이 예정되어 부마가 정해져있는 상태였기에, 공주들의 죽음과 함께 가례를 올리지 않은 부마들의 작위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명혜공주의 부마는 동안위(東安尉) 신요경으로, 논란 끝에 현종은 부마의 위호를 환수하게 된다. 최초 명혜공주의 묘는 성남시 수정구에 위치했다. 실제 이곳에는 봉국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는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었다. 그러다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가 고양 서삼릉 경내로 옮겨지면서, 지금은 봉국사의 존재만이 당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부여 명혜공주 태실비의 앞면, ‘명혜공주아지씨태실(明惠公主阿只氏胎室)’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부여 명혜공주 태실비의 뒷면, ‘강희구년삼월십삼일입(康熙九年三月十三日立)’이 새겨져 있다. Ⓒ김희태

 

이러한 명혜공주의 태실이 부여군 가화리에 있었는데, 동생인 명안공주의 태실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했다. 현재 명혜공주 태실비의 앞면은 ‘명혜공주아지씨태실(明惠公主阿只氏胎室)’이 새겨져 있어, 누구의 태실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뒷면에는 태실비를 세운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강희구년삼월십삼일입(康熙九年三月十三日立)’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강희는 청나라 성조(=강희제)의 연호로, 강희 9년을 환산해보면 1670년(=현종 11년)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해당 태실비는 1670년 3월 13일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혜공주의 태실비는 현재 가화리를 떠나 정림사지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세워져 있으니,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 이상 모르고 지나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의외로 부여에서 만난 태실의 흔적을 통해 조선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으며, 혹 부여를 방문하실 기회가 있으면 ▲ 부여 선조대왕 태실비(=충화 선조대왕 태실비) ▲ 부여 의혜공주 태실 ▲ 부여 명혜공주 태실비 등을 주목해보길 권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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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bogir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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