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청년칼럼=김봉성]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팬티를 벗겨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간절함을 생각해 봐야 한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낡은 사각 팬티를 벗기며 그의 수치심을 생각했다. 그가 부끄럽지 않은 척하는 것도 안타까웠고, 이런 일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일상이 되어버린 것도 안타까웠다. 나는 나의 면구스러움을 티내지 않는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그저 오줌을 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 선생님! 음료수라도 사 드릴테니까 저 좀 도와주시겠습까?”

지하철 화장실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휠체어를 탄 중년 사내가 내게 부탁했다. 화장실에서 일보는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나는 휠체어에서 변기 위로 그를 옮기는 정도를 예상했다. 장애인 여성이라면 비장애인 여성에게 부탁해야 할 테니, 여성은 더 난감하리란 생각은 당시에 하지도 못했다. 이 글을 퇴고하면서야 깨달았다.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가며 나는 단 한 번도 장애인의 배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입구 옆에 있는 넓은 공간, 여차하면 나도 급할 때 일보고 나올 수 있는 화장실의 여분쯤으로만 여겼었다.

Ⓒ픽사베이

내 예상과 달리 그는 세면대에 상체를 기대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 상태에서 팬티를 벗겨 달라고 요청했다. 발목까지 벗겼다. 그 다음 그의 가방에 든 플라스틱 통을 꺼냈다. 그걸 성기에 대 달라고 했다. 다 큰 어른의 성기에 내 손이 그토록 가깝게 다가간 적이 없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에 따라 거리와 각도를 조절했다. 그의 엉덩이가 움찔하는 듯하더니 오줌 소리가 났다. 플라스틱 통이 무게를 더하며 따뜻해졌다. 소리가 끊겼을 때, 나는 플라스틱 통을 톡톡 털어 마무리해줬다.

그는 세면대에 기댄 채로 플라스틱 통을 받았다. 세면대에 오줌을 버리고 플라스틱 통을 헹궜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의 팬티를 올렸다. 아마 그는 내 손끝의 조심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내 조심스러움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불결한 것에 손이 닿는 것을 경계하듯 엄지와 검지만 썼다. 그의 살에 내 살이 닿지 않도록 경계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데, 그는 내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그는 이런 일에 능숙했다. 유창한 말재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렸다. 말이 멈추면 배뇨가 도드라지기에 나도 열심히 맞장구쳤다. 그의 대변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그는 대변 볼 때가 더 곤욕이라고 했다. 상상 해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를 변기에 앉혀야 했고, 그가 일을 다 볼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그를 휠체어로 옮겨줘야 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겪는 문제는 불편한 수준이 아니었다. 비데가 없으면 뒤처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하긴 그것까지 누군가에 부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 때는 뒤처리를 못한 채로 옷을 입는다고 했다.

장애가 불편할 수는 있어도 수치스러우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내가 가진 장애인에 대한 통념은 그들이 불편할 것이라는 정도였다. 그래서 불편함을 넘어선 그들의 일상적 수치심이 당황스러웠다. 내 통념의 민낯이 사실은 무관심이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장애인 화장실을 수백 번 지나치면서 한 번도 그들의 사정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자신은 지적 장애인이 아니라고. 정신이 너무 멀쩡하다고.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2011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은 86.1%이다. 그런데 사회가 장애인을 차별하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도 72.3%이다. 대부분이 차별하지 않지만, 대부분이 차별한다는 모순된 결과는 무관심으로만 설명된다. 자신이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은 그동안 장애인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대면한 상황에서 장애인을 배려한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대면한 적도 없어 결과적으로 차별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날 이후 장애인 화장실을 지나갈 때면 비데가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한 인간이 뒤처리를 하지 못한 채 팬티를 입는 장면이 그려지면, 내 세금이 비데로 쓰여도 괜찮을 것 같다. 1년에 몇 번 쓰이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겪을 부당한 모멸감을 생각하면 비데 설치를 수긍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길 위의 노란 점자 블록이 잘 보인다. 신호등의 도보 가능 알림소리도 잘 들린다.

오늘도 내가 자각하지 못한 무관심 속에서 장애인을 비롯한 노인, 외국인, 동성애자 등의 사회 약자들의 우울을 일상화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피해자가 있다면, 무관심도 가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노란 점자 블록과 건널목 신호등에서부터 내 시력을 높여 나간다면 세상은 좀 더 좋아질 수 있을까. 부디.

 김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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