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멍멍멍]

1.

투쟁이었어요. 처절한 싸움이요. 의사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너무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할 지 몰라요.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어요.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니까. (『Bending the Arc』, 40:11~, 말키아데스)

『밴딩 디 아크 : 세상을 바꾸는 힘』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가 시간이 흐른 뒤 인터뷰를 통해 밝힌 말이다. 그렇다. 완치될 거라는 확신 없이 치료를 지속하는 건 쉽지 않다. 다큐에 등장하는 의대생 폴 파머와 김용, 운동가 오필리아 등의 인물은 병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해 약을 먹지 못하거나, 며칠 복용하고 중단하여 만성 질환이 되어버린 환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고군분투 한다. 정부나 세계기구에서도 예산이 없다며 손을 놓아버렸음에도 말이다.

다큐멘터리에는 “영혼의 마취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사람의 생명과 권리를 경제적 논리로 판단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비용과 경제 논리에 잠식된 사회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비용에서도 효율을 먼저 따진다. 약이 비싸기 때문에 집단으로 결핵에 걸린 사람들이 있음에도 그냥 방치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경제적 문제가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는 행동을 합리화 할 순 없다. 비용 최소화라는 문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실천이 함께 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채 비용 문제만을 언급하는 비판은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도 된다는 주장과 같다. 이러한 주장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인류애와 희망을 상실한 상태가 바로 영혼의 마취다.

‘밴딩 디 아크’ 스틸컷 Ⓒ네이버영화

2.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고, 나는 난치병이 있는 몸이었다. 이 문제는 현실을 지배했다. 작게는 내가 먹는 것, 입는 것부터 크게는 내 가치관까지.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무력감과 함께 했다. 하고 싶은 일에는 계산기를 먼저 두드렸다. 생활비와 치료비, 그리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시간. 그걸 다 빼면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걸 해야만 했다. 효과가 좋은 치료 방법도 있었지만 너무 비쌌다. 돈으로 시간은 살 수 없다지만 거짓말이다. 비싸고 좋은 치료법은 시술도 빠르다. 일상으로의 복귀도 빠르다. 병원 로비에는 VIP만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따로 있다. 일반 환자는 출입을 금한다는 문구가 써있다. 그 길을 지나 일반 진료실에서 아침 일찍부터 대기한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한다. 환자들에겐 일상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자 처절한 싸움이다.

우리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을 하신다. 본인도 담배와 술이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쉽게 끊지 못하신다. 의지가 부족해서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질병은 사회와도 연관되어 있다.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의지가 부족해서, 교육이 부족해서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게 아니다. 높은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에 시달리면서도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걸 찾는 것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의지박약이라며 개인만을 탓하는 건 다큐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시계를 보지 못해서 약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다는 발언을 하는 일부 인물의 생각처럼 편견에 가깝다. 이러한 인식이 강화되면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3.

한국 사회 또한 경제력에 따르는 불평등이 심각하다. 교통사고나 산업재해, 범죄 등으로 부상을 입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다. 아주대 중증외상센터 이국종 교수의 말처럼 돈 있는 사람은 전화 한 통이면 헬기를 타고 수술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가 사고가 난 노동자는 몇 군데의 응급실을 돌아다니다 제 때 수술을 받지 못해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는다. 중증외상센터 설립이 추진되며 이슈화 되던 시절 관련 자료들을 찾아 본적이 있다. 2년 전인 17년도 기준으로 우리나라 상위 20개 병원의 평균 중증응급환자 응급실 대기시간은 14시간이고, 응급실 과밀화 지수는 상위2개 병원 평균 100.7%였다. 수치가 100을 넘었다는 건 간이침대나 의자, 바닥에서 대기하는 환자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이건 누구 한 명, 특정 병원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경제적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어선 안된다. 한국 사회는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다고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경제력과 무관한 인권의 영역이다. 보편적 권리로 보장받아야 한다. 중증 외상센터 환자들도 대부분 노동자다. 한참 일해야 할 나이에 부상을 입는 것이다. 이들이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회로 복귀하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도 손실이다. 개인에게도 치명적인 좌절이 될 것이다. 가난한 자는 돈을 벌기 위해 더 위험한 일에 떠밀리고, 그렇지 않은 자는 ‘좋은 직업을 선택했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의지가 부족하다’는 논리로 비용과 의지의 문제로 치환하며 쉽게 타자화 해버린다.

4.

그 어느 때보다 기회와 평등에 민감한 시대다. 동시에 경쟁이 미덕이 되고, 차이와 차별을 혼동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라고 하며 동시에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강화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걸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이다. 그러나 묵묵히 세상을 바꿔 나가는 사람이 있다. 의대생이었던 폴 파머는 황무지 같던 공간에 병원을 세우고, 약을 챙겨 먹도록 돕는 자원봉사자 시스템을 구축해 많은 사람을 살렸다. 의대생이었던 김용은 세계은행 총재가 되어 최빈국(最貧國)에서 전염병이 위험 수위에 이르면 자동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전염병 보험 제도' 같은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바뀐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 같은 비관 속의 자그마한 낙관을 통해서 말이다.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동시에 갖는 게 핵심입니다. 문제가 있는 걸 모른 척 하거나 해결책이 없는 척할 수는 없어요. (『Bending the Arc』, 1:32:57~, 김웅)

 이광호

 스틱은 5B, 맥주는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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