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Silene capitata Kom.

연천 가는 길은
다른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의 모든 길이
길로 연결되어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나는 여기서 발견했다.
<원구식의 ‘연천 가는 길’에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그 규모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땅의 가장 흔한 풍경은 좌우로 즐비한 논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 측면에서 시인의 말대로 연천 가는 길은 우리 땅의 모든 다른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 그것이 연천 가는 길뿐일까마는 말이지요. 그러나 차창에 비치는 겉모습만 그러할 뿐, 한 발짝만 속으로 내디디면 세상의 모든 길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자기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연천 가는 길, 연천을 거쳐 포천을 지나 철원까지 오가는 길, 그곳엔 여름에서 가을 사이 각별한 야생화가 피고 집니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식어가며 가을에 전하는 ‘여름의 선물’과도 같은 연분홍 꽃이 한탄강과 그 지류들 가장자리에 피어 있습니다. 그것도 천 길 벼랑에 매달려 피어 있습니다. 바위 절벽에 피어 있기에 해마다 풍성하고 빈약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수십, 수백 년 된 늙은 느티나무와 달리 해마다 새로 피는 꽃인 탓에 언제나 첫사랑 고향 소녀 같은 해맑은 표정을 잃지 않으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분홍장구채가 그 주인공입니다.

경기도 연천의 유명한 좌상 바위와 한탄강이 굽어보이는 바위 절벽에 자리 잡은 분홍장구채가 화사한 연분홍 꽃송이를 한 아름 늘어뜨리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붉은 바위 끝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견우노옹의 헌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는 ‘헌화가’의 대상이 철쭉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천 길 벼랑에 핀 꽃을 보면 그 모두가 ‘헌화가’에 나오는 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경기 북부 한탄강 가 바위 절벽에 핀 분홍장구채를 고개를 치켜들고 올려다보노라면 ‘쇠고삐 잡은 손 부끄럽다 아니 하면 기꺼이 천 길 낭떠러지에 올라 꽃 꺾어 바치리다’고 한 견우노옹이 자연 떠오릅니다.

길이 30~45cm까지 뻗은 줄기 끝에 꽃송이를 다닥다닥 달고 있는 분홍장구채. 잎은 마주나며, 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이다. 8~10월 피는 꽃은 꽃잎은 5개로 길이 10mm, 너비 2mm이며 깊이 2mm정도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로 밖으로 길게 뻗는다. 암술대는 2~4개. Ⓒ김인철
Ⓒ김인철

우리나라 산과 들, 강과 바다에 산재한 바위에 붙어 피는 야생화가 한둘이 아니지만, 봄 영월·정선 등 동강변에 피는 동강할미꽃, 가을 주왕산 등지 바위 절벽에 피는 둥근잎꿩의비름, 그리고 늦여름부터 가을의 초입까지 경기 북부 한탄강변에 피는 분홍장구채, 이들 셋을 ‘3대 절벽 꽃’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꽃과 식물체의 아름다움이나 희귀성 등 이모저모를 고려할 때 말입니다. 그 모두 처음엔 가깝고 낮은 곳에서도 자라고 있었지만, 갈수록 사람의 손길을 피해 더 높은, 더 가파른 곳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니, 아득하고 아슬아슬한 곳에 자리 잡은 것들만이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바위 절벽에 곡예 하듯 매달려 핀 분홍장구채. 그 덕에 해마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첫사랑 고향 소녀처럼 해맑게 피어나는 꽃송이를 만날 수 있다. Ⓒ김인철
Ⓒ김인철

꽃받침이 장구통을, 꽃 피기 전의 꽃봉오리와 줄기의 모습은 장구채를 닮았고 꽃 색은 분홍색이어서 분홍장구채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절벽이나 계곡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30cm~45cm까지 자라며, 8월부터 늦게는 10월 초순까지 연분홍 꽃이 우산 형태로 달립니다. 연천과 철원, 포천 이외 영월, 홍천, 화천, 옥천, 대전 등지에서도 자생하는 게 확인되었지만, 전체 개체수가 많지 않아 여전히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북한 함경도와 황해도에서도 자라는 등 세계적으로 거의 한반도에만 분포하지만, 압록강변 중국 지역에도 생육하는 것으로 알려져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습니다. 

강원도 철원 한탄강 상류 계곡에서 만난 분홍장구채. 그리고 지금은 출입이 통제된 경기도 포천의 비둘기낭 폭포 주변의 깎아지른 절벽에 핀 분홍장구채.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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