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세상구경]

[논객칼럼=허영섭] 바둑판은 가로, 세로 열아홉줄씩으로 그려져 있다. 그 361개의 교차점 위에서 흑백 착점의 수순에 따라 대국이 이뤄지는 것이 바둑이다. 특히 가로, 세로 열아홉줄이라는 규칙은 다른 스포츠 종목의 규칙과 비교해서도 매우 엄격한 편이다. 축구의 경우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지만 동네 축구에 있어서는 경기장 규격이나 선수 구성이 서로의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길거리 농구’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바둑판에서만큼은 프로선수들이 겨루는 한국기원 바둑판이나 노인정 바둑판이나 모두 열아홉줄이다.

만약에 바둑판이 지금의 열아홉줄에서 스물한줄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적으로 대국을 이끌어가는 방식이 상당히 달라지게 될 테고, 이에 따라 기존 착점에 익숙한 바둑계의 거부감이 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으로서는 현행 체제에 대해 특별한 불만이 제기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스물한줄 바둑이 새로 선보인다 하더라도 일부 바둑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 가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바둑계의 돌연변이로 치부될 가능성조차 없지 않다.

그러나 ‘만약’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스물한줄 바둑이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직접 대국할 수 있는 기회까지 누렸다. 필자의 오랜 바둑 친구인 이종우 시인이 스물한줄 바둑판을 마련해 놓고 집으로 초청한 것이다. 아예 동호인 모임을 구성할 생각에 바둑판을 열 개나 주문했다니 보통 호기심 차원이 아니다. 동호인 모임이 잘 풀리면 기원이라도 차릴 기세다. 그렇다고 돈을 벌겠다는 계산도 아닌 것 같다. 지금껏 여덟 권의 시집을 냈고, 올해도 ‘청록파의 시 세계’라는 평론집을 낸 예순 중반의 시인으로서 특유의 도드라진 발상이다.

먼저 스물한줄 바둑을 처음 두어 본 소감부터 밝힐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앙 무대가 넓어 곤경에 처하더라도 탈출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게 기존 바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하지만 무작정 쫓기다간 상대방에게 외세를 허용하고 끝내 대세가 기울어지게 된다는 이치에서는 마찬가지다. 화점을 중심으로 하는 귀살이 정석도 다를 바가 없겠으나 변에서는 두 칸이 넓어짐으로써 기존 포석과는 상당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기껏 3~4급의 어쭙잖은 실력으로 너무 거창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스물한줄 바둑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점은 맞바둑일 경우 덤을 과연 몇 집이나 공제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일단 바둑판이 넓은 만큼 선착의 효과가 줄어드는 것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현행 바둑에서도 덤 계산이 계속 바뀐 끝에 지금처럼 여섯집 반으로 굳어졌듯이 스물한줄 바둑에서도 경험적인 축적을 통해 해결돼야 할 문제다. 하수가 상수와 마주 앉을 경우 과연 몇 점을 깔고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기존 바둑과 똑같은 기준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도되는 모험이다.

바둑판의 칸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판의 크기가 커지게 됨으로써 생기는 불편은 또 다른 문제다. 기존 열아홉줄 바둑판이 일반적으로 세로 45.5㎝, 가로 42.5㎝ 크기인 데 비해 스물한줄 바둑판은 가로, 세로가 2㎝씩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바둑판을 놓는 탁자도 커져야 할 것이다. 대국에 바둑알이 많이 필요한 것도 물론이다. 지금은 흑백 알이 각각 180알 안팎이 필요하지만 스물한줄 바둑에서는 기본적으로 220알 정도는 준비돼 있어야 한다.

가장 궁금한 것은 알파고와 이세돌 선수가 다시 스물한줄 바둑판을 앞에 놓고 시합을 벌인다면 승부가 어떻게 펼쳐질 것이냐 하는 점이다. 알파고가 열아홉줄 바둑에 있어서는 ‘딥러닝’이 되어 있었지만 스물한줄 바둑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학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착점이 서투르지 않을까 여겨진다. 프로기사들의 입장에서도 스물한줄 바둑이 당장에는 그렇게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정석과 포석에서 상당한 변화가 따를 것이라 여겨진다.

“한 판의 대국마다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비유되는 것이 바둑이다. 바둑판의 착점이 늘어날수록 제각각의 사연과 내력을 지닌 대국이 이뤄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바둑도 변화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스물한줄 바둑에 지레 거부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고대 중국에서는 열일곱줄 바둑판이 사용됐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물론 2000년 전의 얘기지만 열아홉줄 바둑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요즘 초보용의 아홉줄 바둑도 유행하고 있다. 마라톤 경기에서도 하프와 울트라 코스가 있으며, 더 나아가 트라이애슬론으로 확대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대국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는 사실이 바쁜 일상생활에서 짬짬이 시간을 내 바둑을 즐기는 애기가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일 것이다. 수읽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다. 그러나 어차피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신선놀음이다. 지금의 바둑판에서보다 더 커다란 우주를 느끼게 된다면 굳이 곁눈질로 바라볼 것도 아니다. 바둑판을 바라보며 시상을 가다듬는 한 애기가의 새로운 시도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궁금하다.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사)세계바둑교류협회 초대 회장

  대한바둑협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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