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사진작가의 14,400km의 여정] 모스크바(Moscow)

꺼지지 않는 불꽃

어느 등성이에 묻혀 유해조차 찾지 못한
그대의 충정을 기억하겠노라.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그대의 용맹을 기리 간직하겠노라.

2차대전에서 사망한 소련군(민간인 포함)은 대략 2700만~3000만 명이다. 1970년대 남한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전 세계로 볼 때는 1억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니 히틀러가 역사상 최악의 살인자인 것은 분명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히틀러와 맞서 싸운 스탈린이 죽인 사람은 최대 400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2차대전 사망자를 최소 2700만 명으로 잡아도 그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은 대략 5400만 평(188.4km2)이 필요하다. 32평 아파트 1,687,500개를 평면으로 지을 수 있는 면적이니, 쉽게 말해 작은 도시 하나를 무덤으로 덮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명용사의 비’를 만들어 수많은 전사자들의 넋을 한꺼번에 기리는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어 그냥 몽땅 몰아넣고 그 영혼을 달래주니 전쟁이 남긴 상처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상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1년에 서너 차례 엄숙한 의식을 행하고, 후손들이 그들을 잊지 않고, 그 앞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타오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완벽한 보상은 아닐지언정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작은 위로가 되리라.

모스크바 붉은광장 한편에 있는 ‘무명용사의 비’와 ‘꺼지지 않은 불꽃’. 어느 국가이건 자국의 존위를 위해 목숨을 잃었으나 유해조차 찾지 못한 전사자들이 있어, 각자의 방식으로 그들의 충정을 기억하고 넋을 위로한다. Ⓒ김인철
Ⓒ김인철

밝음이 강할수록 어둠도 짙다

모스크바의 밤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화려하고 밝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Mikhail Baryshnikov)와 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Oliver Hines)가 주연했던 영화 <백야>(White Nights)에서
모스크바는 우중충하고 우울하다.
그 어느 영화인들 우중충하게 나오지 않은 영화가 없었기에 모스크바의 이미지는 회색빛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도시는 깨끗하고, 여인들은 예쁘고, 고딕풍의 건물들은 낭만적이고, 호텔들은 화려하다.
밤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면에 담긴 어둠의 세계는, 밝은 만큼 짙다.

사진 속의 강물은 잔잔하고,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고, 분수는 멋지게 물을 뿜어낼지라도
그곳에는 노숙자와 술 취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심한 악취를 풍기며 관광객에게 다가와 구걸을 하고 담배를 얻는다.
그러므로 밤에 모스크바 거리를 걷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이 어찌 모스크바만의 아픔일까?
밝음이 강할수록 어둠은 그만큼 짙다는 사실은 세계 공통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스크바의 낮은 서울이나 서구의 여느 도시 못지않게 붐비고 화려하지만, 밤이 되면 차량과 사람의 오고 감이 급격히 줄면서 가로등이나 건물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만이 형형하다. Ⓒ김인철
Ⓒ김인철

노동이 진실이다

내가 잡고 있는 이것은 폴대(pole shaft)가 아니다.
내가 끼고 있는 이것은 장갑이 아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은 작업복이 아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나는 지금 한 그릇의 밥을 들고 있다.
나는 지금 한 잔의 커피를 만들고 있다.
나는 지금 미래의 술 한 잔과 휴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나의 인생이다.

그것이 노동의 진실이다.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서양이든 동양이든 그 어는 곳에서든 노동은 숭고하고 진실한, 인생 그 자체다. Ⓒ김인철

한없이 깊은 모스크바의 지하철

모스크바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뉴욕에서도 사람들은 한쪽을 비워둔다.
그 이유는 바쁜 사람을 위해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먼저 지나갈게요” 혹은 “실례합니다” 혹은 “잠깐만요”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다.
즉 나의 행동이 다른 (바쁜)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므로 두 줄 서기는 정착되기 어렵다.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모두 깊다.
전쟁에 대비해서란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러시아 침공은 처절한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어떤 미련한 사람이 또다시 러시아를 침공하겠는가?

* 모스크바에서 전철표를 끊으면 표 2장을 준다. 1장은 개찰구를 지나는 즉시 버리고
1장은 간직한다. 그 1장도 내리는 곳에서 검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버려서는 안 된다.
만약 버렸다가 검표원에게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한다(몇 배인지는 모르겠다).
또 지하철 요금은 똑같다. 1정거장을 가건, 10정거장을 가건 똑같다.
멀리 갈수록 요금을 더 내는 한국의 요금체계와 비교하면 납득되지 않는다.

한없이 깊고, 넓고 화려한 모스크바의 지하철.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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