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Mitte Des Lebens)

삶의 한가운데는 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

하루의 한가운데는 낮 12시이고, 1년의 한가운데는 7월 2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한가운데는 어디일까? 80년을 산다면 40세일 것이고, ‘운이 몹시 나빠서’ 백년을 산다면 50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청춘의 시기인 30세가 지나면 사실상 삶의 한가운데를 지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의 삶은 어쩌면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들을 수습하면서 살아가는 덤이지 않을까.

니나 뷰슈만은 37세이다. 작가 루이제 린저는 1940년대 말에 평균수명을 74세로 잡았던 것 같다. 2019년에 독일인의 평균수명이 80.07세이고 여자가 82.44세인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게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이는 무의미하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삶의 한가운데이다. 스티브 잡스는 1955년에 태어나 2011년에 사망했다. 지상에 머물렀던 시간은 56년에 불과하다. 그의 삶의 한가운데는 세계를 변혁시킨 아이폰을 발표한 2007년이지 싶다. 무려 52세에 삶이 가장 빛났던 것이다.

니나는 소설의 여주인공들 중에서 쓰라림과 괴짜의 선도이다. <좁은문>의 알리사,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안나 카레리나>의 안나, <노틀담의 꼽추>의 에스메랄다, <인형의 집>의 노라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삶의 무게와 사랑에의 번민은 그녀들보다 더 크다.

12살 때, 결혼하는 언니의 면사포에 침을 뱉는가 하면, 거의 20여년 만에 재회한 언니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그대로 잠을 자버린다. 아버지가 의사에게 보낸 편지에 니나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 이 아이는 차갑고 방종하고 몰인정합니다.---철면피한 아이입니다.

차가운 성격 탓인지 니나는 집을 떠나 유럽 여러 나라를 방랑하고, 필연적으로 여러 남자를 만나고,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얼떨결에 결혼하고 헤어지고,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정작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슈타인과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섹스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대학교수이자 자신을 치료했던 의사인 슈타인을 사랑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변치않는 애정으로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고 일기에 니나에 대한 기록만 남기는 슈타인이 측은할 뿐이다.

“아, 나는 그녀를 내 생명처럼 붙들고 싶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리라.”

삶의 굴레를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 친 여인

그러나 이 소설은 결코 연애소설이 아니다. 멜랑꼬리하고, 감미롭고, 가슴 쓰린 사랑의 격정이나 달콤함은 없다. 바덴바일라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동생 니나를 만난 언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니나가 간직하고 있는 슈타인의 일기와 편지를 언니가 읽으면서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간간히 니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니나는 부모와 집을 떠나 홀로 낯선 곳을 헤매면서 삶을 꾸려가지만 결혼도, 가정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을 탈출시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나아가 한 남자의 인생도 보기좋게 망가뜨렸다. 사랑을 거부한 니나에게 분노를 느끼기보다는 사랑하는 여자를 ‘쟁취’하지 못한 남자에게 화가 치민다.

현대 독일 소설답게 어려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슴에 길이 간직할 명문장도 많이 등장한다. “이 세상에 양면적인 타협처럼 구제불능의 결함은 없다”, “나는 꼭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널 사랑하므로’라고.”, “그녀는 결코 이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언젠가는 그것을 경멸할 것이다.”

동생을 이해하지 못했던 언니는 일기와 편지를 모두 읽은 후 –당연히 그러하듯이- 동생을 이해하게 되고 눈물을 터트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촘촘하게 얽힌 그물 같은 인간의 숙명에 울음을 삼켰다. 누가 있어 그 그물을 찢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설령 찢어버릴 수 있다 한들 그 그물은 늘 발에 밟히고 걸려 우리의 뒤를 질질 따라다니지 않겠는가?”

번역가 이영제는 “삶이라는 엄청난 대기(大器) 속에는 우리가 몇 자의 어휘로 간단히 표현하는 행복, 불행, 진실, 죄악, 설움, 고통, 사랑, 인내, 갈등, 좌절 등등의 엄청난 사실들이 들끓고 있다. 그 모든 어휘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그 굴레에서 헤쳐나오기 위해 몸부림 친다”고 말했다. 니나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 굴레를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 친 여인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일까? 아니면 작가의 행위가 더 중요할까?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2002 향년 91세)는 독일 바이에른 피츨링 출생이다. 일부 문헌에는 그녀가 옛 동독 출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뮌헨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했다. 2차대전 때 나치에 저항해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받은 이력으로 저항문학가로 알려졌으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나치에 협력했다고 하기도 한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북한 방문 후 <또 하나의 조국>을 썼으며, 작곡가 윤이상(尹伊桑)과의 대담록인 <상처입은 용>(Der verwundete Drache)을 1977년에 발표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자칭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는 모양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경찰의 잘못된 행태를 소재로 삼으면 다음날 경찰이 항의 전화를 하고, 정치인을 비판하면 심지어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고 개그맨들이 목청을 높였다. 소설은 소설일 뿐 작가의 행위는 관계가 없다. 언젠가 내가 어느 글에서 “이문열은 매우 뛰어난 작가이다”라고 쓴 글을 읽고 자칭 진보주의자가 시비를 걸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 세상에 읽을 소설은 한 편도 없게 된다.

<삶의 한가운데>는 좌충우돌 젊은 여성의 의식 편력(遍歷), 사랑 편력, 체제에의 저항을 유려한 문체로 다루었다. 번역도 매우 잘 되었다. 이 소설은 1950년에 발표되었다. 독일은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나라는 둘로 갈라졌다. 패전의 암울함을 딛고 독일문학을 부흥시키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이 소설을 읽기 바란다.

* 더 알아두기

1. 1993년 한림출판사에 간행된 <세계명작 소설: 이해와 감상>에는 모두 180명의 작가가 소개되어 있다. 그중 여성은 10명도 되지 않는다. 남자의 잘못인지, 여자의 잘못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2. 노벨문학상 수상자 110명 중 여성 수상자 역시 10명이 되지 않는다. 첫 수상자는 <닐스의 모험>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셀마 라게를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rlöf)로 1907년에 받았다. 첫 여성 흑인은 1933년 미국의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다. 대하소설 <대지>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펄 벅(P.S. Buck)은 1938년에 받았지만 문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이 뛰어난 것은 분명하다.

3. 고전문학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권한다.

4. 사실상 단 한편의 소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여성 작가는 <앵무새 죽이기>를 쓴 미국의 하퍼 리(Nelle Harper Lee),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미국의 마가렛 미첼(Margaret M. Mitchell)을 들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5. 한때 독서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인기가 사그라든 작품 중에서 읽어야 할 책은 시몬느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의 <빙점>,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 콜린 맥콜로우의 <가시나무새> 등이 있다. 카슨 맥컬러스(Carson McCullers 미국)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역시 명작이지만 아쉽게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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