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의 날아라 고라니]

[청년칼럼=고라니] 버스를 놓친 경험은 한 두 번이 아니다. 내 장이란 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주했다. 불길한 감각이 배를 스치고 지나가면 머리는 빠르게 굴러간다. 약속시간 전까지 공용 화장실에 들를 수 있는 최적의 경로와 여유시간을 계산하는 것이다. 작은 징후는 순식간에 속을 쥐어짜는 고통으로 자라고, 식은땀을 흘리며 가까운 화장실로 한 발 한 발 위대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해 화장실을 또 가게 되면 버스는 이미 떠나 있기 일쑤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붙어 다닌 병명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공부 스트레스 때문인 줄 알았다. “그 따위로 하다간 대학 못 간다.” 교무실에서 뼈아픈 질책을 듣고 돌아간 곳은 교실이 아닌, 변기 위였다.

증상은 점점 심해졌고 혹시 큰 병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병원도 여러 번 찾았다. 비수면으로 굴욕의 대장내시경과 위내시경까지 받았지만 의사의 진단은 너무 명쾌해서 허탈할 지경이었다. “아주 깨끗합니다.” 한약과 쑥즙, 매실원액 등 장에 좋다는 걸 모조리 먹어봐도 효과는 잠깐이었다.

Ⓒ픽사베이

수험생활이 끝나고, 병은 잠시 사라졌다. 치맥과 삼겹살, 곱창으로 이어지는 야식 퍼레이드에도 장은 끄떡없었다. 덕분에 장트러블 없는 분홍빛 인생이 펼쳐지나 싶었지만, 군입대와 동시에 병은 재발했다. 욕설은 기본이요, 이틀 동안 물을 못 마시게 한다든가, 베개에서 머리를 들고 잠을 자게 하는 가혹행위가 일상인 군생활은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마음의 고통은 곧장 몸으로 이어졌다. 그 쯤 되니 내 몸이 엄청나게 정직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어떤 병은 바이러스나 세균으로 감염되지 않는다. 병원에서 주는 처방이라곤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가 전부일 땐 재빨리 진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내가 지목한 최초의 범인은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삐딱한 가치관 때문에 스트레스를 사서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긍정의 힘을 키우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애용했다. 나보다 비참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 방법, 그리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니체의 엄청난 명언을 인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50년 전에는 내 나이 때 하루에 6시간 자고 공장에서 일했는데 넌 편하게 앉아서 공부하면서 엄살이냐”라든가 “군생활도 인생 공부니까 즐겁게 맞고 즐겁게 욕을 먹자”라고 자기세뇌를 하는 식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는 좋았다. 난 원하던 학교에 입학했고 군대에선 모범병사 소릴 듣고 지냈다. 그러나 정작 간절히 바랐던 소망, 그러니까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긍정적 사고방식은 나의 인생에서 나의 욕망을 보기 좋게 거세했다. 주변의 요구에 맞춰 나를 조각하느라 잘라낸 파편들이 매일 변기 안에 배설됐다.

모로 가도 대학만 잘 가면 된다는 학벌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학교에서,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는 행위가 당연시되는 군대에서 이 병은 창궐했다. 이윤과 실적을 높일 수 있다면 그 어떤 부도덕한 방법도 면죄부를 받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물로 포장된 뇌물이 은밀하게 오가고, 하도급 쥐어짜기가 만연한 공간에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환자’로 진단되기 십상이었다.

환자는 눈치 없는 사람이다. 전문기술도 없고, 나이도 많은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저녁이 있는 삶’이라든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같이 배부른 소리나 지껄이는 사람이다. 주 52시간 근무를 초과하지 않게 눈치껏 일을 집에 가져가서 할 생각은 안 하고 직원을 더 달라고 징징대는 사람이다. 집단의 목소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자신의 권리는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사람. 그가 바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이 시대의 인재다.

고통의 원인을 찾기 어려울 때 스트레스성 어쩌구 하는 병명을 붙여버리면 고통의 책임은 개인의 것이 돼버린다. 내가 멘탈이 약해서, 내가 조직에 적응하지 못해서, 내가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봐서 아픈 것이 돼버린다. 정신적인 고통이 그대로 몸에 전달돼 장염, 위염, 두통, 피부염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란 말이야.”라고 말하는 건 아무 소용없다. 이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악령아 물렀거라!" 소리치던 원시신앙과 다를 바 없다. 강요된 자발성이 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해방의 격동기는 시작된다. 

약한 건 잘못이 아니다. 약한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세상이 잘못이다.

고라니

칼이나 총 말고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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