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논객칼럼=이호준] 추석이 지난 지 한참인데 차례 이야기를 꺼내려니 좀 생뚱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전해드리는데 시간은 문제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저는 지난 추석 때 집에 못 갔습니다. 노모를 모시고 있는 형편이라 명절 때는 어지간하면 귀가하는데 이번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전에 밝혔듯이 절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절도 분주해집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나 백중만큼 떠들썩한 건 아니어도 합동차례라는 특별한 행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합동차례를 전체적으로 조율하고 관리하는 게 제 역할이라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집 대신 절에서 합동으로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식을 준비할 만한 사람이 없다든지, 가족이 없는 혈혈단신이라든지, 차례 자체를 간소화하기 위해서라든지,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든지…. 절에서는 명절 전에 접수를 받아 고인의 위패를 준비합니다. 당일은 위패 수만큼 메를 짓고 무‧표고버섯 등으로 맑은 탕국을 끓입니다. 물론 과일이나 떡‧전‧나물 등도 풍성하게 차립니다. 생선이나 육류는 없지만 집에서 차리는 차례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머무는 절의 경우 오전 10시 30분부터 행사가 시작됐는데, 9시쯤 되자 제주들이 하나 둘 도착했습니다. 혼자 오는 사람도 있었고 여럿이 오기도 했습니다. 일찌감치 도착한 사람들은 소풍이라도 온 듯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절에서 지내는 합동차례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습니다. 예불부터 드리는 게 조금 다르지요. 예불이 끝나면 제사가 진행됩니다. 절차는 간단합니다. 제주들이 순서대로 나와 술을 붓고 절을 합니다.

Ⓒ픽사베이

제가 있는 절에서는 이번 추석에 200여 기의 위패를 모시고 차례를 지냈습니다. 300명 정도의 제주가 참석했고요. 위패 수에 비해 제주가 많지 않았던 것을 보면 1~2인 가족이 많았을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제사가 끝난 뒤 절에서 제공하는 공양을 마치고 각자 돌아가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납니다. 공양을 안 하고 근처 음식점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가족도 꽤 많은 것 같았습니다.

합동차례를 지켜보는 내내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집집마다 차례 준비를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한꺼번에 지내면 무척 효율적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차례의 근본 의미를 생각하면 효율성만 따질 건 아니지요. 하지만 세상이 빠른 속도로 바뀌니 효율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지인이 이야기했던 ‘현지 차례’ 이야기가 떠오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집 가족들은 명절 전에 풍광 좋은 바닷가에 콘도미니엄을 잡아둔답니다. 그리고 대행업체에게 차례상을 주문한다고 하지요. 추석 전날 형제들이 각자의 가족과 함께 콘도미니엄으로 모여듭니다. 추석 전야를 떠들썩하게 함께 보낸 뒤 명절 당일은 준비된 차례상으로 차례를 지내고 각자 흩어집니다. 물론 온 김에 며칠씩 놀다가는 가족도 있겠지요.

효율성만으로 따지면 썩 괜찮아 보이는 차례입니다. 물론 온 가족이 모여서 송편을 빚고 음식을 만드는 전통적 풍경은 포기해야겠지요. 그렇게 ‘각박’해지는 현실을 개탄하는 시각도 있지만, 주부들이 받는 ‘명절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고개를 저을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통만 고집하다보면 누군가가 겪어야 할 고통은 늘 조금도 줄어들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그런 방식의 차례도 차례상을 차려주는 대행업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업체가 얼마나 있을까 싶어 포털사이트에 ‘차례상’이라고 쳐봤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업체들이 성업 중이었습니다. 가격은 보통 수십만 원대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문하면 차례 지낼 음식을 모두 만들어서 배송해준다고 합니다. 선택하는 음식의 종류도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직접 차릴 땐 전통적인 차례 음식에 초점을 맞췄다면 맞춤 차례상에는 가족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고른다는 것이지요. 옛 어른들이 보시면 호통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현실적’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합동차례든, 주문형 차례상이든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려온 ‘며느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긍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비용 적게 들고, 음식 만드는 시간 절약해서 가족들과 함께 즐기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 나눠먹고… 긍정적 측면은 많습니다. 조상들이 노할 소리일까요? 관점의 문제겠지요. 휴양지 차례는 제게도 여전히 낯설지만, 주문형 차례상은 머지않아 대세가 될 것 같습니다. 2~3대만 내려가면 차례를 지낼지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판이니, 어느 정도 절충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찰이 아니더라도 변형된 형태의 기업형 합동차례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합니다. 이제 좀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능동적으로 전통과 현실의 접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집에 가는 대신 남들 차례를 지내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던 한가위였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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