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 250주년 특별기획 '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 4

18~19세기의 실학자들 대부분이 민본(民本)∙위민(爲民)이란 용어를 강조하였고, 이를 통해 민중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인 유학사상과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서, 민본이나 위민이라는 관념에는 아직까지 민중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있으며, 권리가 없는 민중을 위해 지배자의 선정(善政)을 강조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민본사상이나 위민사상은 근대민주주의 사상과는 엄격히 구별되는 것으로, 이는 민권(民權)사상에 의해 보완되고 극복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근대 민주주의란 자유민권사상(自由民權思想)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민중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정체(政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학자들 중에서 민본사상 내지 위민의식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민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대표적 인물이 茶山 정약용이었다.
다산은 국민 참정권(參政權)의 원초적 형태를 제시하였으며, 아울러 모든 민중들에게 공직을 맡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민중의 저항권(抵抗權)도 인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선생의 정치사상은 국민주권론에 접근하고 있는데, 하나하나 그 핵심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참정권의 원초적 형태제시

茶山은 <탕론(蕩論)>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무릇 천자(天子)의 지위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져 천자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나 천자가 되는 것인가. 5가(家)가 1린(鄰)이 되고 5가에서 장(長)으로 추대한 사람이 인장(鄰長)이 된다. 5린(鄰)이 1리(里)가 되고 5린에서 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이장(里長)이 된다.
5비(鄙)가 1현(縣)이 되고 5비에서 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현장(縣長)이 된다.
여러 현장들이 다같이 추대한 사람이 제후(諸侯)가 되는 것이요, 제후들이 다같이 추대한 사람이 천자(天子)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저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이루어진 것은 또한 여러 사람이 추대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5가가 화협하지 못하게 되면 5가가 의논하여 인장을 바꿀 수가 있고, 5린이 화협하지 못하면 25가가 의논하여 이장을 바꿀 수가 있고, 구후(九侯)와 팔백(八伯)이 화협하지 못하면 구후와 팔백이 의논하여 천자를 바꿀 수가 있다. 구후와 팔백이 천자를 바꾸는 것은 5가가 인장을 바꾸고 25가가 이장을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인데, 누가 신하로서 임금을 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중략)∙∙∙
뜰에서 춤추는 사람이 64명인데, 이 가운데서 1명을 선발하여 우보(羽葆:새의 깃털로 장식한 의식용의 아름다운 양산)를 잡고 맨 앞에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지휘하게 한다. 우보를 잡고 지휘하는 자의 지휘가 절주(節奏)에 잘 맞으면 모두들 존대하여 ‘우리 무사(舞師)님’ 하지만, 그 우보를 잡고 지휘하는 자의 지휘가 절주에 맞지 않으면 무두들 그를 끌어내려 다시 전의 반열(班列)로 복귀시키고 유능한 지휘자를 재선(再選)하여 올려놓고 ‘우리 무사님’하고 존대한다. 그를 끌어내린것도 대중(大衆)이고 올려놓고 존대한 것도 또한 대중이다.

위의 자료는 통치자와 민중과의 관계가 계약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 계약은 통치자가 이를 존중할 때에만 유효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치자가 선정을 하겠다는 계약을 파기할 경우에 민중들이 그에게 위임하였던 통치권을 박탈하여 새로운 인물을 선출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는데,  춤추는 사람들의 비유를 통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茶山은 법(法)을 제정함에 있어서도 민중의 동의를 중요시 여겼는데, 선생의 <원목(原牧)>이란 글에서 ‘이정(里正)은 백성의 여망에 따라 법을 제정하여 당정(黨正)에게 올린다. 당정은 백성의 여망에 따라 주장(州長)에게 올린다. 주장은 국군(國君)에게 올리고, 국군은 황제에게 올리게 되므로 그 법은 모두가 백성에게 편익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요컨대 茶山은 민중의 동의에 기반을 둔 통치체제 즉 민중에 의한 정체(Government by the people)를 간접적으로나마 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여기에서 우리는 국민 참정권의 초기적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② 능력에 의한 공직(公職) 등용 주장

茶山은 수십 집안의 세도가들이 모든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 것에 강한 분노를 터뜨리면서,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 관직을 공직(公職)으로 전환시키려 하였다.
국가의 관직이 공직이 되기 위해서는 관직 설치의 목적이 민중에 대한 봉사에 있어야 하며,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조건은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茶山은 <서얼론>에서 ‘서얼이라 하더라도 능력이 있을 경우에는 대간[사헌부∙사간원]의 벼슬은 작은 것이니, 반드시 정승을 시킨 다음에라야 옳은 것이다.’라고 했고, ‘막힌 것을 뚫자’라는 의미의 글인 <통색의(通塞議)>에서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민중이 능력에 따라 공직을 맡을 권리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인재를 얻기 어렵게 된 지가 오랩니다. 온 나라의 훌륭한 영재(英才)를 발탁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8,9할을 버린단 말입니까. 온 나라의 백성들을 다 모아 배양(培養)하더라도 진흥시키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중의 8,9할을 버린단 말입니까. 소민(小民)이 그중에 버림받은 자이고, 중인이 그중에 버림받은 자입니다.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이 그중에 버림받은 자이고, 황해도∙개성∙강화 사람이 그중에 버림받은 자입니다. 강원도와 전라도의 절반이 그중에 버림받은 자이고, 서얼(庶孼)이 그중에 버림받은 자이고,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은 버린 것은 아니나 버린 것과 같으며, 그중에 버리지 않은 자는 오직 문벌 좋은 집 수십 가문뿐입니다. ∙∙∙(중략)∙∙∙
어찌 천지가 그 정기를 모으고 산천이 그 진기(眞氣)를 길러서, 반드시 수십 집에만 산출시켜주고, 그 더럽고 혼탁한 기운은 나머지 집안에 뿌려준 것이겠습니까.∙∙∙(중략)∙∙∙
인재를 등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서∙남∙북에 구애됨이 없게하고 가깝거나 멀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간에 가리는게 없게하여 중국의 제도와 같게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다산은 공직을 맡은 자에 대한 공정하고 엄격한 평가제도 즉 고적제(考績制)를 중요시 하였는데, 특히 백성의 행복을 책임져야 할 수령(守令)에 대한 평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수령의 직책은 책임지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들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큰 강령(綱領)은 여섯이 있고 여섯 강령 중에 그 조목이 또한 각각 넷이 있습니다. 무엇을 여섯 강령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농사요 둘째는 재화(財貨)요 셋째는 교육이요 넷째는 형정(刑政)이요 다섯째는 병무(兵務)요 여섯째는 공업(工業)입니다. 무엇을 네 조목이라 하면, 농사의 조목으로는 첫째는 농사짓고 길쌈하는 것이요 둘째는 목축(牧畜)이요 셋째는 나무를 심는 것이요 넷째는 제방을 막고 개간하는 것입니다. 재화의 조목으로는 첫째는 부세요 둘째는 환자(還上)요 셋째는 곡식을 수매 방출하는 것이요 넷째는 진휼(賑恤)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조목으로는 첫째는 효제(孝悌)요 둘째는 예의 바른 풍속이요 셋째는 문학이요 넷째는 혼인입니다. 형정의 조목으로는 첫째는 형벌이요 둘째는 소송이요 셋째는 싸우고 구타하는 것이요 넷째는 무단(武斷)입니다. 병무의 조목으로는 첫째는 교련(敎鍊)이요 둘째는 병기(兵器)요 셋째는 성호(城壕)요 넷째는 도적을 잡는 것입니다. 공업의 조목으로는 첫째는 채광(採鑛)이요 둘째는 공장(工匠)에 대한 것이요 셋째는 관사(官舍)의 관리요 넷째는 도로 관리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으로부터 고적(考績)하는 글에 이 24개 항목의 일을 일일이 들어서 그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과 잘하고 잘못한 것을 조목조목 논하여 글자 수에 제한두지 않고 한결같이 어사(御史)가 서계(書啓)하는 형식과 같이 하고, 또 나누어 9등급을 만들되 상지상(上之上)은 한 사람을 넘지 않게 하여 승진 발탁시키고, 하지하(下之下)는 세 사람 이하가 되지 않게 하여(작은 道는 두사람으로 한다.) 벌로 내쫓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감사(監司)가 임의로 등급을 나누게 하되 수효를 제한하지 않게 하며, 또 언제나 연말마다 한번씩 고적하되, 부임한 날자가 300일이 되지 않은 자는 논하지 말고, 그 날짜가 차기를 기다려서 즉시 장계(狀啓)를 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③ 민중 저항권의 인정

1797년 윤6월 茶山이 곡산부사로 부임하던 날 전임 부사의 학정에 저항해 소요사태를 일으켰던 이계심이 자수해왔는데,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같은 사람이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 백성을 위해 그들의 어려움을 대신 호소했구나. 천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하겠다” 하고 방면하였다.
조정 대신들이 모두 때려죽이라고 주문했고, 정치적 스승인 번암 채제공마저도 기강을 엄히 잡으라고 권고했지만 무죄 석방을 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이미 茶山의 민중저항권에 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 후 강진 유배지에서 茶山은 그가 처해있는 사회를 민중봉기가 임박한 혁명전야와도 같은 극한 상황으로 인식했고, 지방관이나 아전 그리고 토호 같은 부패세력들을 호랑이나 잡초로 비유하면서, 양(羊)들이나 새싹이 잘 자라려면 이들(민중)이 힘을 합하여 호랑이를 죽이고 잡초를 뽑아내야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즉 茶山은 민중이 정치에 참여하고,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의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사회를 구상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민중의 저항권을 인정하였으나, 실제로 사회혁명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혁명의 필요조건인 관권의 해이, 국가 재정의 파탄, 개혁정치의 좌절과 같은 상황은 무르익었지만, 혁명의 충분조건으로서 이를 추진할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훗날 1894(갑오)년에  전봉준 등이 중심이되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茶山의 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산교육문화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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