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사진작가의 14,400km의 여정] 바르샤바(Warsaw)5

밤의 이미지는 아름답다

슬픈 역사쯤이야 극복하면,
-그만큼의 아픔과 세월이 요구되지만-
극복하면 그만이다.
어느 민족인들 아픔이 없으며, 어느 나라인들 고난이 없을쏘냐.
그러므로,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하여 슬픔이 묻히지야 않겠지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위로와 희망을 준다.

보여주기 위한 관공서용 조명도 필요하지만
작은 가게의 작은 등불도 있어야 한다.
창 위에 매달린 LOTTO 간판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 아닐까.

1980년 일찌감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바르샤바의 옛시가지. 1944년 독일군에 의해 85% 이상 파괴된 것을 5년여에 걸쳐 완벽하게 재건한 훌륭한 사례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인철
Ⓒ김인철

그것은 나의 그림자였을까

낮에 보면 훨씬 좋았을
바르샤바의 옛시가지를 저녁 7시 넘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여름이었고 백야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것일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곳의 운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쓸데없는 만찬회만 없었어도
VIP들의 의미없는 일장훈시만 없었어도
더 깊은 추억이 남았으련만...

그 아쉬움 속에 1시간 넘게 거닐었던 옛시가지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한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
문득 돌아보면 내 곁에 있다가.
그것은 나의 그림자였을까,
혹은 이름만 겨우 아는 낯모를 타인이었을까.

아주 긴 세월이 흘러
바르샤바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회한에 담긴 눈동자가
떠오르면 그것이
바로 그리움이었노라.

나치 독일이 의도적으로 파괴한 도시를, 굳은 의지와 열정으로 복구한 폴란드인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는 심정으로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옛시가지. 밤이 깊어 주황색 조명이 들어오자 마음속 고향 마을인 양 더없이 따듯하고 더없이 다정다감하다. Ⓒ김인철
Ⓒ김인철

빈센트 반 고흐를 아시나요?

그는 어쩌면 허리가 굽었을 것이며
소의 눈을 지녔을 것이며
손은 길고 가늘고 하얬을 것이다.

그 길고 가는 손으로 그린 그림을 나는
바르샤바 뒷골목에서 보았다.
네덜란드-프랑스-영국-벨기에를 떠돌았지만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는
폴란드를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거리에서 고흐가 떠오른 것은 그의 그림처럼 우울하고, 고즈넉한 풍경 때문이 아니라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의 안쓰러운 일생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부탁이니까 울지 마. 슬픔은 영원히 남는 거야. 난 이제 집에 가는 거라고”
고흐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동생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에게 슬프면서도 위안이 되는 유언을 남기고
고흐는 눈을 감았다.
그의 염원처럼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있을까?
아니면 우울한 이방의 뒷골목에서 영원히 방랑하고 있을까?

석양 무렵 옛시가지 구석구석은 그 어디를 바라보든 액자 없는 ‘명화’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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