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공모전 수상작]

1.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평론가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동진과 정성일을 꼽을 것입니다. 이들은 한국 영화 평론의 상징과도 같아서, 라이벌이기보다는 쌍두마차로 보입니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그 두 사람의 성향이 판이하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친숙한 화법으로 이미지와 상징을 풀어내며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후자는 자신의 화법을 다른 이들과 대조하는 방식으로 열정[또는 애정.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정(情)]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이동진이 상대방 위주로 말을 건넨다면, 정성일은 자기 위주로 말을 건넨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이는, 이동진이 기자 출신이라는 것과 정성일이 잡지사 출신이라는 점에 기인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두 매체의 성격은 확연히 다릅니다. 기사라는 건 공익을 위한 정보가 담겨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언론입니다. 반면에 잡지사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것, 흥미 위주의 정보를 다룹니다. 말하자면 정성일이 여성 잡지사에 최초로 취직한 후에 KINO라는 영화 잡지를 창간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그 대중의 범주에 자신도 속한다고 말하면서, 자신과 같은 대중에게 말할거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사실상 자신과의 대화에 가깝습니다.

자신과의 대화에 참여하려면 그 자폐적인 세계에 공감과 이해를 보내야 합니다. 그의 세계에 오타쿠적인 면모가 있는 이유입니다. 오타쿠들에게는, 세계 일부에서 발견되는 흥미를 자신의 세계 전반에 적용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그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으니 잠깐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면 됩니다. 요컨대 우리는 그의 발언에 동의하거나 반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 세계가 아니라 그의 세계이고, 그런 이유로 우리가 알던 법칙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그는 비판받고 있습니다. 평론가라면 대중에게 의견을 개진하면서 영화 세계로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의무를 배반했습니다. 이때 그 의무에 충실한 것은 이동진입니다. 이동진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잘 인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그 험한 길을 위한 여러 도구를 장만해둡니다. 따라서 그를 두고, 헤르메스와 헤파이토스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또한 그렇다면, 정성일은 오르페우스와 하데스에 빗댈 수 있을 것입니다. 헤르메스가 에우리디케를 구하려는 오르페우스를 저승으로 인도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뜬금없을 수 있는 이 비유는, 그들이 오가는 곳이 저승이라는 점을 들어 사용했습니다. 영화는 육체가 사라지고 정신만이 남는 곳이라는 점에서 저승입니다.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몰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 또한 동일합니다. 어두컴컴하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우리는 누구나 오르페우스가 됩니다. 즉, 영화가 시작되면 저승에 머무를 수 있지만 그것이 끝나는 순간에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 헤어짐의 과정은 항상 우리를 상념에 젖게 합니다. 그러니까 귀갓길에 맴도는 생각은 우리가 그를 애도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픽사베이

여기서 그 두 사람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정성일의 세계는 저승이며, 그는 그곳의 지배자인 하데스입니다. 그의 에우리디케는 저승에서만 성립하기에 아무리 해도 데려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세계는 언제나 그곳에만 있고, 우리는 그저 거쳐 가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때, 이동진이 정성일을 저승으로 인도했다는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관계가 아니라 영화적 은유에서 그들은, 에우리디케라는 해석의 지점을 두고 이승과 저승 사이에 존재하는 양측의 인도자인 셈입니다.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는 저승에 잠시 머무르는 존재, 그래서 데려와야 할 존재입니다. 여기서 오르페우스이자 헤르메스인 이동진은, 자신의 페르소나인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이끌어 사람들 앞에 보이고자 합니다. 따라서 그는,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정성일은, 영화에 대한 사유가 늘 그곳에만 머무르는 것을 발견했고 그걸 꺼내올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그곳에 눌러앉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글에서 자폐적인 성향이 발견되는 건 아마도 그 때문입니다.

때때로, 저승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에우리디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승에 남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영화에 푹 빠져 애도 과정을 거치지 못합니다. 이때 정성일은, 명계의 왕으로서 영화에 푹 빠져버린 영혼에게 질서를 선사합니다. 그것은 저승의 질서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이동진의 것과 반대됩니다. 이동진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바탕으로 틀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도록 빌려줍니다. 이동진이 독서광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것들을 조합해 새 도구를 만들어냅니다. 여행길에 처음 오른 사람도 쉽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때 그것을 두고, 이동진이 평론가로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중학교 2학년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라는 기자들의 신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자가 아닙니다만, 그의 출신에 빗대어 설명한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해도, 쉽다는 말은 깊이가 얇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특정다수를 겨냥하기 위해 사용하는 쉬운 언어는 글의 품질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승으로의 탐사를 위해 그가 제조하는 도구의 사용법이 쉽다고 해서, 그 도구가 쉽게 만들어지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쉽게 탐사할 수 있도록 어려운 가공을 해내는 게 그입니다. 물론 도구 없이도 저승으로 모험을 떠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성공적으로 탐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다르게 말해, 맨몸으로 동굴에서 살아나오는 사람이 대단한 것이지 동굴의 깊은 곳까지 향하는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누구나 심연의 끝을 보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한계로 그 끝까지 가볼 수는 없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 선봉에 서있는 게 바로 평론가들입니다.

쉬운 언어로 좋은 글을 쓸 수도 있지만, 쉽게 쓰면서 열화되는 판본도 있습니다. 어렵게 써야만 전달되는 맥락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혹자는, ‘쉬운 말로 어려운 개념을 전달해야 고수’라거나 ‘왜 굳이 어려운 말을 쓰느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굴의 깊은 곳까지 가보려면 전문적인 장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얇게 만든 장비는 딱 얇은 곳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얇은 장비로 깊은 곳까지는 갈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장비가 초월적이거나 사람이 초월적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동진과 정성일은 그런 초인이 아닙니다. 다른 분야로 따지면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이나 폰 노이만 정도가 있겠지만, 아직 우리 곁에는 그런 평론가가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달리하여서, 영화에는 천재가 없는 게 아니라 영화가 그만큼 어려운 매체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지구의 가장 깊은 곳을 정복하지 못했고, 영화 또한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시로 든 것처럼 사후세계와도 같은 미지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2.

이동진이 대중적이고 정성일이 폐쇄적이라는 말은 업계에 속한 우리에게 사실상의 표준입니다. 누군가가 쉽고 재밌는 글을 쓰면 이동진적이며, 누군가 어렵고 특이한 글을 쓰면 정성일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두 명의 평론가를 두고 각자의 매력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두 명의 스타일에는 딱히 우위라고 할만한 게 없습니다. 만약 얇은 영화에 간편한 해석을 보고자 한다면 이동진이라는 길을 선택할 것이며, 두꺼운 영화에 번거로운 해석을 보고자 한다면 정성일이라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단지, 하나의 영화로 향하는 두 가지 시선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정성일을 두고서, 글의 두서가 맞지 않는 현학적인 표현이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동진을 두고서, 매번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픽업하고 쉬운 표현만 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중들의 취향이 쉬운 것에만 몰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에 대한 증거는, 우리가 정성일을 두고서 글을 쉽게 쓴다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은, 분명하게도 모순점을 품에 안은 궤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동진을 두고 글을 너무 어렵게 썼다는 말을 할 때 논리를 지니게 됩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명징하게 직조한다’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그들은 이동진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처럼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대중을 상대로 평론을 하는 평론가가 그렇게 어려운 말을 사용해도 되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대중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평론가가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굳이 쉬운 말을 두고 왜 어렵게 표현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동진이라는 사람이 기준이 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현상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탐사를 위한 도구를 개발하여 판매해왔고, 그래서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도구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도구의 작동법이 너무 어렵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그들에게는 스스로 도구를 만들어낼 만한 능력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요컨대 우리는, 그들이 도구를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도구를 만드는 힘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계로의 탐사는, 결국에 혼자 힘으로만 떠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나 평론가에게 도구를 제공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지식인과 예술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로 확대되면서 우리가 잠시 묻어두었던 사실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쪽 진영이 스노비즘이라는 비판을 가하면, 저쪽 진영에서는 문해력의 저하라는 말로 답했습니다. 그 두 가지 모두 정답은 아니지만,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문해력의 저하입니다. 분명 신문에서 한자가 사용되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가 독서를 자주 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상 시대에 굳이 글의 해독력이 필요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상 시대에 영화는 그들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비록 우리를 지배하는 게 짧고 간결한 영상들일지라도, 영화는 여전히 그들의 근원에 자리합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상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그것이 꿈과 직결되는데, 그렇다면 짧고 간결한 영상은 꿈의 단편일 것이고, 긴 흐름의 영화는 꿈의 장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영상 시대를 살면서도 영화를 잊지 않는 건 그들이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입니다.

꿈이라는 비유를 들면서, 그게 언어로 표현되지 않을 무언가라는 점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로 표현되지 않기에, 그것이 우리의 직관과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상을 만든다는 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직관, 보고 듣고 느낀 사적인 경험을 타인과 나누기 위해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미지, 인간의 내면을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즉, 직관을 객관화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결국, 직관으로 만들어진 영상을 해독하는 것은 직관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그를 표현하는 언어를 찾지 못해도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 것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언어는 단지 직관을 포장하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영화를 다룬 글들, 대표적으로 평론과 같은 것을 읽을 때 문장이 이해가 안 간다거나 하는 일은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주술관계가 맞지 않는 서술과 해독이라도, 그것들은 각각의 파편으로 나뉘어 이미지의 형태로 우리의 내면에서 조합됩니다. 직관은 직관으로 통하기 마련입니다.

이동진이나 정성일이라든가 결국에는 그들 또한 한 명의 관객으로서 자신을 표현할 뿐입니다. 그의 의견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반대로 우리의 생각이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해력은 영상을 본다는 것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방법, 두 가지 직관에 관해서만 알아두면 됩니다. 이동진은 종교학과 출신으로서 자신이 바라보는 은유와 상징들, 그 직관을 다독량에서 끌어오는 지식을 통해 객관적으로 표현합니다. 정성일은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서 자신이 떠올리는 순간의 이미지, 그 직관을 자신의 세계에 초대해 직관끼리 대면하도록 합니다.

이때 논쟁적인 것은 정성일의 글쓰기 방식입니다. 직관을 외부로 나누고자 하는 이동진과는 다르게, 정성일은 자신의 직관을 나누어 서로 싸움 붙입니다. 요컨대 그의 글에서는, 각각의 직관이 별개의 개체로서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론가에게는 글이 곧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의 글은 마치 하나의 육체에 여러 영혼이 다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저승의 정의에도 어울립니다. 그곳에는 끝없는 영혼의 집합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이 없을 테지만, 그들 모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직관에 가까워집니다. 다양한 의견을 한 자리에서 수용할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각자의 영화관이 있고 그게 곧 직관입니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듣더라도 결국에는 자신의 생각이 될 테고, 그런 생각을 타인과 나누는 동시에 새로운 생각을 해낼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동진을 둘러싸고 벌어진 현상을 보면서 무언가를 느낀다면, 그 비판은 우리에게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직관을 인식하는 건 개인의 몫입니다. 그 전달은 결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느낌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고 답을 찾아내야 합니다. 내면의 목소리, 그 직관에 스스로 응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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