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논객칼럼=김희태]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춘천의 태실에 이어 오늘은 원주에 소재한 태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원주의 태실은 크게 ▲ 산현리 태실 ▲ 대덕리 태실 ▲ 태장동 왕녀복란 태실 ▲ 운산 태실이다. 이 가운데 태장동 왕녀복란 태실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6호)를 제외한 다른 3곳의 태실은 비지정 문화재로, 마치 숨바꼭질하듯 꼭꼭 숨어 있어 태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도로 옆 왼쪽에 있는 봉우리의 정상에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가장 먼저 소개할 원주 산현리 태실의 경우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 산 2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해당 번지로 검색할 경우 너무 광범위한 지역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해당 태실을 찾기 위해서는 ‘산현리 442-6번지’를 검색해야 한다. 현재 해당 장소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 봉우리 정상에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접근성 측면에서 보자면 도로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기에 나쁘지 않은 편이다.

태실에 가기 전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 부부와 해당 태실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양평 제안대군 태실비, ‘왕세자남소손태실(王世子男小孫胎室)’이 새겨져 있어 산현리 태실의 명문 해석에 참고할만하다. Ⓒ김희태

이야기의 주요 내용은 크게 지난 1968년 태실이 도굴되었다는 사실과 지금도 파헤쳐진 곳 아래 태함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최초 도굴되었을 당시만 해도 방치되어 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태실비의 경우 전반적인 마멸이 심하게 진행이 되어 앞면은 육안 판독이 어려우며, 뒷면은 일부만 확인 가능한 수준이다. 앞선 논문과 기타 자료 등을 취합해보면 태실비의 명문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앞면의 경우 ‘황명만력이십팔년십이월이십구일해시생왕?손남아지씨태실(皇明萬曆二十八年十二月二十九日亥時生王?孫男阿只氏胎室)’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명문에서 확인이 안 되는 글자의 경우 ‘자(子)’로 추정할 경우 ‘왕자손남(王子孫男)’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손(孫)을 손자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반면 손남(孫男)을 아명으로도 볼 수 있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양평 제안대군 태실비의 앞면에 ‘왕세자남소손태실(王世子男小孫胎室)’의 사례가 있기에 전자의 해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해당 태실은 선조의 손자 태실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원주 산현리 태실의 앞면 Ⓒ김희태
원주 산현리 태실의 뒷면 Ⓒ김희태

한편 산현리 태실의 뒷면을 보면 ‘만력이십구년사월삼십일입(萬曆二十九年四月三十日立)’이 새겨져 있다. 만력은 명나라 황제인 신종의 연호(=만력제)로, 만력 28년을 환산해보면 1600년(=선조33년)에 태실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태실비의 경우 태어난 연도가 확인되지 않기에 정확하게 누구의 태실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하한선인 4년까지 태어난 선조의 왕자들을 추려보면 ▲ 인성군(1588년, 정빈 민씨) ▲ 의창군(1589년, 인빈 김씨) ▲ 흥안군(?, 온빈 한씨) ▲ 경평군(1600년, 온빈 한씨)이 확인된다. 그런데 인성군 태실의 경우 청주 산덕리 태실(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86호)인 것이 확실하기에 제외된다. 또한 흥안군의 경우 이괄의 난(1624)에 동조했던 전례가 있어 태실의 훼손 가능성이 높아 역시 제외된다. 또한 경평군 태실 역시 대전시 서구 가수원동의 갑천변 가수원 다리 인근에서 확인되었고, 의창군 태실은 춘천 덕두원 태실의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선조의 왕자 중 해당 태실과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며, 산현리 태실은 선조의 손자 중 한 명의 태실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당 태실은 누구의 태실일까? 

원주 산현리 태실, 태실비의 뒤로 도굴로 인해 파헤쳐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김희태

이를 알기 위해서는 왕실의 태실 조성과 함께 양반가나 민가의 태실 관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주목해보면 좋다. 특히 궁을 나간 왕자나 공주, 옹주의 자녀들의 경우 왕실의 예법으로 태실을 조성했을 가능성은 낮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 있던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태실 관련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해당 기록을 보면 “잠저(潛邸)를 뒤져 정원 북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찾아내었다”고 언급, 왕위에 오르기 전 선조의 태실이 잠저에 묻혔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선조의 왕위 계승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순회세자의 요절로 명종의 직계가 단절이 되자, 명종의 이복동생인 덕흥대원군의 아들인 하성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즉 선조는 방계 출신의 왕으로, 당시만 해도 일개 왕자의 아들에 불과했기에 왕실 예법에 따른 아기씨 태실이 조성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잠저 북쪽의 소나무 숲에 태를 묻은 것이다. 

측면에서 바라본 원주 산현리 태실 Ⓒ김희태

따라서 앞선 제안대군 태실의 사례처럼 산현리 태실 역시 세자의 아들일 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세자인 광해군의 아들 중 한 명의 태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광해군의 아들은 문성군부인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폐세자 이지(祬)로, 1598년 생으로 알려져 있다. 홍성익의 <조선시대 胎室의 역사고고학적 연구> 논문을 보면 <신계현읍지>에 폐세자 이지의 태실비로 추정되는 명문이 있다고 하는데, 태실비의 앞면은 ‘원손아지씨태실(元孫阿只氏胎室)’이, 뒷면에는 ‘만력이십칠년이월십팔일입(萬曆二十七年二月十八日立)’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경우 원주 산현리 태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광해군의 아들의 가능성이 있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 원주 대덕리 태실, 1494년 이전에 태어난 왕자의 태실 중 한 명으로 추정 

두 번째로 소개할 원주의 태실은 대덕리 태실로, 해당 위치는 ‘원주시 호저면 대덕리 410-2번지’다. 해당 위치에 도착하면 길의 오른쪽에 봉긋하게 솟은 산의 정상에 대덕리 태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한눈에도 태실이 있을 법한 산이라는 느낌을 준다. 정상까지의 접근성은 나쁘지 않은 편이나, 비지정 문화재이기 때문에 친절한 이정표나 안내문은 기대할 수 없다. 이래저래 알고 찾아가지 않는 이상, 찾는 사람도 많지가 않다. 현재 태봉산의 정상에 위치한 대덕리 태실은 외형상 태실비가 1/3 가량 잘려 나간 것이 특징인데, 태실비의 뒤로 도굴로 인해 파헤쳐진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태실비의 상단 부분은 정상에서 대략 10m 아래 떨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태봉산의 정상에 자리한 원주 대덕리 태실 Ⓒ김희태
정상에서 바라본 대덕리 태실, 태실비의 1/3 가량 잘려있는 모습으로, 도굴의 흔적으로 파헤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김희태

잘린 태실비 중 상단 부분과 하단 부분의 앞면 모두 마멸이 심하게 진행되어 지금은 ‘왕(王)’의 글자 형태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논문이나 기타 자료를 보면 최초 앞면에 왕자(王子)가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뒷면의 경우 명문이 잘 남아 있는데, 상단 부분에는 ‘홍치칠년팔월이십(弘治七年八月二十)’이, 하단 부분에는 ‘이일묘시입(二日卯時立)’이 새겨져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앞면은 태주의 ‘성별+아명’이 적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뒷면에는 홍치칠년팔월이십이일묘시입(弘治七年八月二十二日卯時立)이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우선 홍치는 명나라의 황제인 효종(=홍치제)의 연호로, 홍치 7년을 환산해보면 1494년(=성종 25년)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해당 태실은 1494년 이전에 태어난 성종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의 태실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에서 10m 아래 잘린 태실비의 상단 부분이 있다. Ⓒ김희태
태실비의 뒷면의 하단 부분, 육안 판독이 가능한 수준이다. Ⓒ김희태

한편 대덕리 태실의 경우 비석의 형태도 함께 눈여겨보면 좋은데, 비교 대상으로 앞선 산현리 태실비와 달리 비두와 비좌가 없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묘갈의 형태로,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태실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태실비의 형태는 시기에 따라 미묘하게 차이를 보인다. 대개 조선 전기의 경우 ‘비두+비좌’가 없는 형태로, 성종 대 이후 비두 부분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 ‘비두+비좌’가 함께 조성되는 모습이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구분을 통해 해당 태실의 조성 시기를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대덕리 태실비는 그 형태가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사적 제444호)과 양평 제안대군 태실비의 형태와 유사성을 드러내는데, 성종 대에 처음 태실비의 비두가 나타났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비두가 없는 태실비의 외형은 성종 혹은 성종의 앞전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태봉의 정상에 파헤쳐진 채, 태실비 역시 잘린 채 방치된 태실의 외형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사를 거치며 훼손되고, 파괴된 채 방치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

■ 원주 태장동의 유래가 된 왕녀 복란의 태실

원주의 지명 중 유독 눈에 띄는 지명이 있는데, 바로 태장동(台壯洞)이다. 해당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성종의 왕녀인 복란의 태실이 있어 태장동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胎’를 ‘台’로 바꾼 것이라 전하고 있다. 앞선 두 곳의 태실과 달리 원주 태장동 왕녀 복란 태실의 경우 접근성이 나쁘지 않으며, 찾기도 어렵지 않은 편이다. 지금은 우성아파트 뒤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아파트가 조성되기 전 이곳에는 태봉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태실은 해체와 복원 과정을 거치게 되고, 태실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태함이 확인되었는데, 정작 내부에 있어야 할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은 도굴이 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도굴된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은 되찾아 지금은 동국대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원주 태장동 왕녀 복란 태실비의 전경 Ⓒ김희태

왕녀 복란 태실비의 앞면 Ⓒ김희태
왕녀 복란 태실비의 뒷면 Ⓒ김희태

태실비의 경우 명문이 잘 남아 있는 편으로, 태실비의 앞면을 보면 ‘왕녀복란태실(王女福蘭胎室)’이, 뒷면에는 ‘성화이십이년십이월이십구일입(成化貳拾貳年拾貳月貳拾玖日立)’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성화는 명나라 황제 헌종(=성화제)의 연호로, 성화 22년을 환산해보면 1486년(=성종 17년)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앞선 태실들과 달리 한자를 보면 숫자를 표기할 때 ▲ 二=貳 ▲ 十=拾 ▲ 九=玖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태실에서 출토된 태지석을 보면 ‘황명성화이십이년십월십삼일진시생왕녀복란태성화이십이년십이월이십구일장(皇明成化貳拾貳年拾月拾參日辰時生王女福蘭胎成化貳拾貳年拾貳月貳拾玖日藏)’이 새겨져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왕녀 복란 태실비 Ⓒ김희태
춘천박물관에 전시 중인 왕녀 복란 태실비의 태함 Ⓒ김희태

이를 통해 태주는 1486년 10월 13일에 출생한 왕녀로, 태실은 같은 해 12월 29일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해당 태실을 성종과 숙의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순옹주의 태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원주 태장동에 남아 있는 왕녀 복란의 태실은 현재 태실비만 남아 있는 모습으로, 춘천박물관에 태함을 비롯해 태항아리와 태지석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어 함께 보면 좋다. 

■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소생의 숙휘공주, 숙종공주의 태실인 원주 운산 태실

원주의 태실 중 마지막 태실인 운산 태실을 찾기 위해서는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2109-3번지’를 검색한 뒤 도로 쪽에 있는 이정표를 찾으면 된다. 200m 안내 표시가 있는 이정표를 찾은 뒤 밭을 가로질러 두 번째 봉우리 정상에 오르면 운산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초행길에 이정표만으로 찾기란 쉽지 않은 편이다. 앞선 태실과 달리 운산 태실은 두 개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태주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진 경우라 주목된다. 운산 태실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소생의 숙정공주와 숙휘공주의 태실로, 이러한 태실의 형태는 김천시 지례면 관덕리에 있는 숙명공주와 숙경공주의 태실지와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정표에서 200m 떨어진 봉우리 정상에 원주 운산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원주 운산 태실, 2기의 태실이 조성되어 있으며 숙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딸인 숙정공주와 숙휘공주의 태실이다. Ⓒ김희태

한편 옛 사진과 비교해보면 본래 숙정공주의 태실비 상단 부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잘려진 부분을 복원해둔 것이기에 옆에 있는 숙휘공주의 태실비와는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 상단부가 잘린 숙정공주의 태실비를 앞면을 보면 마멸은 있지만 육안 판독이 가능한 수준으로, 태실비 앞면에 ‘?정공주아지씨태실(?靜公主阿只氏胎室)’이 새겨져 있다. 정황상 앞 글자는 ‘숙(淑)’으로 판독되며, 뒷면의 경우 ‘??원년십일월이십오일사시/함풍?년삼월십칠일육대손기호(??元年十一月二十五一巳時/咸豊?年三月十七日六代孫基鎬)’가 새겨져 있다. 또한 태지석이 확인되었는데, 태지석의 앞면은 ‘병술년십일월초칠일해시탄생숙정공주아지씨태(丙戌年十一月初七日亥時誕生淑靜公主阿只氏胎)’, 뒷면은 ‘강희원년십일월이십오일사시장(康熙元年十一月二十五日巳時藏)’이 새겨져 있어 해당 태실이 숙정공주의 태실인 것이 고증되었다.

 

숙정공주의 태실비 앞면 Ⓒ김희태
숙정공주의 태실비 뒷면 Ⓒ김희태

또한 옆에 있는 숙휘공주 태실 역시 마멸이 있지만, 앞면의 경우 ‘공주(公主)’와 ‘태실(胎室)’ 명문은 육안 판독이 가능하다. 앞선 논문이나 자료 등을 취합해 보면 해당 태실비의 앞면에는 ‘숙휘공주아지씨태실(淑徽公主阿只氏胎室)’이, 뒷면에는 ‘강희원년십일월이십??사시입(康熙元年十一月二十??巳時立)’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강희는 청나라 성조(=강희제)의 연호로, 이를 환산해보면 1662년(=현종 3년)으로 태실비가 세워진 시기를 알 수 있다. 한편 판독이 어려운 부분은 숙정공주의 태실비와 비교해볼 때 ‘오일(五日)’로 된다. 따라서 숙정공주와 숙휘공주의 태실은 모두 같은 날에 조성되었음을 태실비의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숙휘공주의 태실비 앞면 Ⓒ김희태
숙휘공주의 태실비 뒷면 Ⓒ김희태

한편 1734년(=현종15년) 강원감찰사의 완문(完文)이 발견된 바 있는데, 해당 문서를 통해 숙정공주와 숙휘공주 태실 주변의 관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사방 100보 안에 금표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수 태실의 경우 도굴로 인해 태지석이 사라지거나 태실비의 훼손과 마멸 등으로 태주를 특정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운산태실의 경우 태주가 명확한 경우이기에 명칭 역시 ‘원주 운산 태실’이 아닌 ‘원주 숙휘공주, 숙정공주 태실’로 바꿔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원주에 소재한 ▲ 산현리 태실 ▲ 대덕리 태실 ▲ 태장동 왕녀복란 태실 ▲ 운산 태실은 저마다의 이야기와 시대상을 담고 있어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해볼 것을 권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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