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코리아 프리미엄 프로젝트]

[논객칼럼=이영환] 필자는 최근 몇 달 동안 한국사회를 강타했던 일련의 사건들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착잡한 심정이었다.

사회적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집단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주장만 되풀이 할 뿐 공적 담론의 장에서 진지하게 토론하고자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현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자기 진영이 주도하는 집회에 참가한 군중의 규모를 강조하면서 자기들만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지극히 비이성적일 뿐만아니라 파시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보였다면 이는 망상인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미국 조지 메이슨 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교수는 저서 『트러스트』에서 신뢰의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진단하면서 내집단에서는 신뢰 수준이 높게 형성되어 있지만, 외집단에 대해서는 신뢰 수준이 극단적으로 낮게 형성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그의 지적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모 일간지의 주필이었던 이규태 선생은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저서 『한국인의 의식구조』 시리즈를 통해 같은 지적을 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집단은 가족, 친족 및 학연·지연으로 연결된 작은 집단을 말하며 외집단은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을 망라한다. 과거와 비교해 이런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픽사베이

사람들 간 신뢰가 낮은 수준에 정체되어 있는 것은 정서적으로 두려움과 불안감이 팽배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잘 모르는 상대방을 신뢰했다가 여러 면으로 낭패를 볼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무의식에 강하기 자리 잡고 있는 사회에서는 외집단에 속한 타인을 신뢰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는 말인가? 뭔가 해결방안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닥칠 초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비하고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양극화로 인한 사회해체를 막으려면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원론적인 얘기지만 필자는 일상에서의 대화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훈련을 통해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에게는 이것이 꽤나 한가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자를 포함해 이미 노년에 접어든 세대든, 지금 사회의 중심에서 일하는 세대든, 심지어 한창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제대로 대화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지식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든, 돈이 있든 없든, 즉 어떤 상황에 있든 간에 우리는 제대로 대화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것이 ‘팩트’요 한국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며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서로에게 말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으로 우리는 현재 온/오프라인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한편으로는 축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앙이기도 하다. 필자는 가장 바람직한 소통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 변화까지 인지하면서 서로의 느낌과 욕구를 이해한 후 모두에게 유익한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를 비롯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이용한 다양한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상대방의 감정과 느낌을 모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소통은 사실 반쯤은 죽은 것이다. 인간 존재 전체로 소통하는 것과는 한 참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소통 방법이다. 여기서 대화를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분류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영어 표현을 사용하자면 ‘conversation’은 ‘넓은 의미의 대화’로, ‘dialogue’는 ‘좁은 의미의 대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화 매트릭스(Conversation Matrix)>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안타깝게도 이 가운데 ‘비판’에 해당하는 것뿐이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좁은 의미의 대화인 dialogue에 관한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면서 비폭력 대화를 제창한 마셜 로젠버그(Marshall Rosenberg)가 말하는 비폭력 대화 내지 공감대화 능력이다. 로젠버그는 저서 『비폭력 대화』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화에서 범하는 실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더 많은 경우 우리는 말을 하면서도 상대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있는지 아예 의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대화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또는 ‘다른 사람을 향해’ 이야기하면서 상대의 존재가 마치 휴지통인 양 우리의 말들을 던져버린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대화의 전형(典型)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로젠버그는 이런 유형의 대화는 폭력대화요, 비공감 대화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솔직함(honesty)과 공감(empathy)을 바탕으로 공감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판단’하려하지 말고 정확하게 ‘관찰(observations)’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섣부른 판단은 결코 공감대화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느낌(feelings), 예컨대 불쾌함, 모욕감, 또는 즐거움 등이 일어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을 권한다. 신경과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느낌은 대화에서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런 느낌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즉 욕구(needs)를 알아차린 후 상대방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탁(requests)하라고 충고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한 후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솔직함과 공감하려는 자세가 깔려있어야 한다. 그 다음 똑같은 방법을 적용해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자신의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대화에 임하는 것이 최고의 공감대화요, 비폭력 대화라고 추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런 수준의 공감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 과연 누가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오랫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학생들과 공감대화를 나누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늦게나마 지금부터라도 공감대화를 실천하려고 노력중이지만 오랫동안 몸에 밴 잘못된 대화 습관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부단히 연습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사회에서 아직은 소규모지만 공감대화를 보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 분들에 의하면 공감대화를 연습한 사람들은 삶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필자는 이것은 한국사회의 선진화를 위한 매우 중요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필자는 이런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왜 공감 능력을 향상시켜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하고 싶다. 공감은 결코 쉽게 체득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젠버그가 공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감을 하는 대신에 자신의 견해나 느낌을 설명하거나, 조언을 하거나, 상대를 안심시키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그러나 공감은 우리에게 마음을 비우고 온 존재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노동운동가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요절한 시몬 베유(Simone Weil)의 말을 인용하면서 공감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사실 기적이다. 스스로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길을 포기하면 안 된다. 결국 나와 상대 모두에게 유익한 대화를 위해서는 공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소한이나마 공감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간파한 후 이를 이용해 상대방을 장악하려는 대화는 그야말로 최악의 대화요, 결국 모두를 패자로 만드는 대화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이른바 파워엘리트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대화 방식이다.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유물이다.

필자는 앞에서 한국사회에서는 외집단에 대한 신뢰가 매우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신뢰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예상되는 다음 수순은 사회해체일 것인 바, 현재와 같은 신뢰 수준이라면 이런 불길한 시나리오를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후손들을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이런 파국을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 필자는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공감대화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공감대화의 기술을 습득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지식공유광장(www.iksa.kr) 운영

 <시장경제의 통합적 이해> 외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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