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사무치는 그리움 짙은 향(香)으로 피어나

꿀풀과의 한해살이풀. 학명은 Elsholtzia angustifolia (Loes.) Kitag.

새벽바람이 소슬합니다. 돌연 무더웠던 여름은 어제이고, 계절이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음을 몸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도시의 시멘트 숲에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습니다. 이런저런 조경수들의 이파리도 울긋불긋 그 색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깡마른 이파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찬바람에 윙윙 울기 전, 한 송이 꽃이라도 더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길을 나섭니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건너뛰지 못하고 찾아가는 곳, 문경새재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산.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에 걸쳐 있는 조령산을 찾아갑니다. 해발 1,017m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좌우로 깃대봉과 신선암봉, 마패봉과 신선봉, 할미봉, 연어봉 등 900m 안팎의 바위산이 연잇습니다. 그리고 기암·괴봉 사이사이 잘생긴 노송(老松)들이 좌우로 가지를 뻗고 서 있어, 동서남북 그 어느 쪽을 바라보든 수묵 담채화 같은 풍경을 그려냅니다. 특히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커다란 암벽이 길을 가로막는데, 그 깎아지른 바위 절벽마다 ‘가을 바위산의 보물’ 가는잎향유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한 해의 꽃시계가 저물어가는 걸 아쉬워하는 ‘꽃쟁이’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입니다.

조령산 바위 절벽에 핀 가는잎향유가 소나무와 산봉우리 등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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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부터 10월까지 바위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어 벼 이삭 같은 꽃차례를 곧추세우는 가는잎향유. 간혹 맨땅에서 살기도 하지만, 대개는 커다란 바위 위에, 혹여 너럭바위들 틈에 흙이 쌓이면 그곳에, 아니면 긴 세월 비바람에 바위가 움푹 파여 흙더미가 모이면 그곳 또한 감지덕지라며 하나둘 모여 꽃을 피웁니다. 한두 송이 피기도 하지만 수십 송이에서 많게는 수백 송이까지 뭉쳐서 피는데, 진홍의 가는잎향유가 높은 산 너른 바위 위에 무더기로 핀 모습은 그 어떤 꽃다발보다 화려하고 화사합니다. 천 길 낭떠러지 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세상을 굽어보는 가는잎향유. 툭하면 생태계를 해치려 드는 인간의 범접을 꺼리는 듯, 수직 절벽에 달라붙어 굽이치는 산 너울을 내려다보는 가는잎향유 군락은 한 번 보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습니다.

지난 10월 17일 만난 가는잎향유의 흰색 꽃. ‘백마 탄 초인’에 대한 갈망 때문인가, 꽃 색이 흰 야생화가 늘 각별한 관심을 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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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잎향유의 화사한 꽃 색, 고고한 자생지 못지않은 특장은 바로 그 어떤 허브 식물보다 강렬한 자연의 향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달궈지고 농축된 향이 가을바람에 실오라기 풀어지듯 솔솔 풀려나 온몸을 감싸면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시월의 어느 가을날 천연의 가는잎향유 향이 폐부에 파고들면, 사진을 담는 내내 온몸이 황홀경에 빠져듭니다. 숲에 나뒹구는 낙엽이 늘수록 가는잎향유의 젓가락처럼 가는 잎은 연두색에서 홍갈색으로 변하며 손을 대기만 해도 부서질 듯 말라가지만, 꽃과 잎 등 높이 50cm 정도의 전초에선 박하 향보다 진한 향이 우러나와 가슴 속까지 파고듭니다. 그 깊고 강한 향에 취하고 즐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가는잎향유 자생지에는 늘 숱한 벌과 나비들이 몰려들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며 황홀한 만추의 성찬을 즐깁니다.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과 가는잎향유의 붉은 꽃이 가을의 정취를 한껏 돋우고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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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물론 깻잎 같은 잎과 줄기가 기름을 머금은 듯 반질반질 윤기가 돌 뿐 아니라 전초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해서 향유(香薷)라 부르는 꿀풀과 향유속 식물의 하나입니다. 마주나는 이파리가 젓가락처럼 길고 가늘다고 해서 가는잎향유라는 별도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조령산뿐 아니라 월악산과 속리산 등 충북 괴산과 보은, 제천, 경북 문경을 지나는 산악지대에 두루 자생합니다. 한해살이풀이어서 해마다 꽃 피는 장소와 개체 수 등은 달라집니다. 아직은 멸종 위기 식물이 아니지만, 서식지가 일부 지역에 한정돼 있어 각별히 신경 써서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우리의 토종 식물 자산입니다.

너럭바위 위에 핀 가는잎향유의 짙은 향에 이끌려 벌 한 마리가 달려들고 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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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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