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사진작가의 14,400km의 여정] 베를린(Berlin)4

내 생명을 걸어야 한다

먼저 3초 동안 묵념을 올린 뒤
어느 쪽이 동쪽이고, 어느 쪽이 서쪽인지 파악하라.
자동차에서 내렸건, 걸어서 도착했건
베를린 장벽 앞에 서면 동서남북의 구분이 애매해진다.

방법은 간단하다.
양쪽을 다 본 후
앙상한 갈비뼈를 떠올리게 하는 벽속의 철근이 더 많이 패인 곳이 동쪽이다.
즉 동독 시민들이 장벽을 넘기 위해
콘크리트 벽을 죽자사자 파괴했다.

그런 다음 그 앞에 서서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해보라.
그대가 혈기왕성한 청춘이라면 능히 뛰어넘을 수 있다고 자신하겠지만
장벽을 세운 사람은 그것을 충분히 감안해서 높이 세웠음을 알아라.

그런 다음 동쪽, 가장 철근이 많이 드러난 곳 앞에 서서
다시 3초 동안 묵념을 올려라.
1961년 8월 12일부터 1990년 6월 13일까지 29년 동안 희생된 사람은
대략 150명.
그들이 추구한 것은 딱 하나
자유!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나약한 굴종의 그늘 속에 사는 것보다 고귀한 것이다. 진리의 칼을 쥐고 죽음을 껴안을 수 있는 사람은 끝없는 진리와 더불어 영원하게 된다.”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동독에서 분리하기 위해 1961년 설치된 베를린 장벽. 1989년 11월 9일 동서독 자유 왕래가 허용되면서 총길이 45.1km의 콘크리트 장벽이 붕괴했다. 현재는 일부가 기념으로 원형 보존되어 있다. 휴전선은 155마일, 248km, 베를린 장벽보다 약 5배 길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포탄의 흔적이 아니라 복수의 흔적

총구가 새빨갛게 달구어져 터져버릴 때까지
총알을 갈겨댔을 것이다.

한쪽은 이 성당을 사수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목숨을 걸고 점령하려 한다.
왜? 무엇을 얻고자?

1945년 4월 말경, 베를린에는 나치군 20만 명이 있었고 그들은 완벽하게 고립되었으며
소련군과 절체절명의 전투를 치렀으나 수많은 목숨만 희생된 채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소련군은 지도에서 베를린을 없애버릴 심산으로 무자비한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만약 미군이 먼저 진격했으면 그렇게 많은 살상과 파괴는 없지 않았을까?
라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다행히 전후에 모든 것이 복구되었으나 이 성당의 총알 자국은 그날의 아픔을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다.

베를린 교구 및 돔 교회가 공식 명칭인 베를린 대성당. 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4월 말 소련군의 무자비한 폭격을 받아 본래의 화려함을 잃고 단순한 형태로 바뀌었다. 베를린 시내를 관통하는 슈프레강. 서울의 여의도 같은 박물관 섬 서쪽에 베를린 대성당이 있다. 그리고 2차대전 당시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는 소련군.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이른바 ‘동방정책(동서화해 정책)’을 추구해 통일 독일의 밑거름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1913~1992).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11월 9일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환호하는 수만 군중을 담담하게 지켜보는 브란트.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이 베를린 시내 한 건물 쇼윈도에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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