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사진작가의 14,400km의 여정] 베를린(Berlin)5

내 몸은 속박되었으나 영혼은 자유롭다

베를린 교외의 어느 큰 호텔 (이름은 알지 못한다)
앞에 있는 박물관 (이름은 알지 못한다)
마당에 세워져 있는 청동 동상.
녹이 슬지 않아 더욱 선명한...

색출되어 붙잡힌 유대인으로 추정되며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로 목숨을 달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면...
더 이상의 추정은 하지 않는 것이
이 남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다.

늘 그렇듯
동상의 남자 꼬추는 너무 많은 사람이 만져서
윤이 반들반들 나면서도
눈에 담긴 깊은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모든 것에의 포기와 실낱같은 희망을
그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

베를린 교외 한 작은 박물관 앞에 놓인 청동 동상. 텅 빈 공간에 달랑 홀로 선 벌거숭이 왜소한 사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어머니가 딸에게

나무 직조기를 가운데 두고 어머니는 딸에게 옷감 짜는 방법을 일러준다.
어머니의 눈은 깊고, 딸의 눈은 아련하다.
어쩌면 열 밤만 지나면 시집갈 딸의 옷을 마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름이 깊게 패인 할머니는 손녀에게 실 잣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아라크네(Arachne)의 후손이 되어 물레에서 실을 뽑아내
질기고 가는 실을 길게 뽑아
옷을 만들고, 커튼을 만들고, 밧줄을 만들고, 그물을 만들고...

콧수염이 더부룩한 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기술일 것이련만
아들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나는 아버지 같은 삶을 살지 않을래요!”
아무렴 어떠랴. 그렇게 삶은 실처럼 질기게 이어지는 것을.

또 다른 건물에서 만난 인물 부조. 어머니와 딸, 할머니와 손녀, 아버지와 아들 등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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