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공모전 수상작]

[오피니언타임스=윤유진] 에르난 꼬르데스(Hernan Cortes)는 스페인의 탐험가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바깥에 한창 관심이 쏟아지던 그 시절, 꼬르데스는 스페인에서 내세운 탐험가였다. 미국에 콜럼버스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꼬르데스가 있는 것이다. 이 꼬르데스가 왜 돌아갈 곳을 남겨두지 않았는고 하니, 바로 그는 정복할 멕시코 땅을 밟자마자 부하들에게 “우리는 멕시코를 반드시 정복할 것이다”라고 밝힌 뒤 자신과 부하들이 타고 온 스페인 함대를 불살라 버린 것이다. 돌아갈 곳이 없도록 만들어 부하들의 정복 의지를 더욱 불타게 만든 것인데, 덕분인지 멕시코는 에르난 꼬르데스의 군대에 정복당했고, 이후 약 100년간의 식민 생활을 하게 된다.

‘돌아갈 곳을 만들지 않는다’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다. 바로 백제의 장군 계백이다. 그는 5000명의 군사로 50만 군사를 약 4번이나 제패한 위대한 장군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패배했고, 신라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는다. 이러한 패배를 예상한 건지, 그저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함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출정하기 전 자신의 부인을 포함한 식솔을 모두 죽였다. 돌아갈 곳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피가 끓어오른 백제군은 어쩌면 패배를 예상했음에도 본인들조차 돌아갈 곳이 없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죽을 각오로 싸워 4번이나 이긴 걸지도 모르겠다.

Ⓒ픽사베이

이렇듯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수행할 일에 대한 의지를 심어준다. 필자는 에르난 꼬르데스의 예시를 ‘정치학개론’ 수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정치 수단에는 강제력, 보상, 권위 등 다양한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위험성을 많이 안고 가는 것이 강제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강제력은 추후 반발이나 보복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있어 효과적인 수단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런 강제력을 효력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강제력을 동원할 것이다’는 의지를 상대에게 보여야 하는데, 그에 대한 예시가 바로 에르난 꼬르데스가 함대를 불태운 것이었다.

또 하나의 예시로 ‘치킨게임’도 있었다. 두 대의 차가 마주보고 달리는 게임에서 두려움을 느껴 먼저 핸들을 꺾는 자가 지는 게임이다. 이 미친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은 바로 게임 시작 전, 자신의 핸들을 상대가 보는 앞에서 뽑아 버리는 것이다. 절대로 핸들을 꺾을 의지가 없음을 내비치는 순간, 상대는 공포에 젖게 되고 결국 승자는 강제력을 내비친 자가 거머쥐게 된다는 이론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강도의 강제력을 동원하는 사람은 비난을 받는다. 특히나 회사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들에게 에르난 꼬르데스처럼 행동한다면, 그야말로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사람들은 이런 강제력을 스스로에게 동원한다.

현대인들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필자 본인도 한동안 완벽주의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각종 스펙은 부족하지 않아야 하며, 외모도 준수해야 하는 판국에 치우친 인재가 되지 않도록 예체능까지 잘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의 압박에 못 이긴 현대인들은 돌아갈 곳을 남겨두지 않는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채찍질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게 아니면 난 안 돼”라는 최면을 스스로 걸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다 잘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뒤쳐질 거야”라는 생각, 한번쯤 안 해본 청년이 드물 것이다. 그러한 생각으로 인해 이 시대에 살아가는 청년들은 끊임없이 불안해지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이러한 글귀를 본 적이 있다. 회사에서 인격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정말 존경하던 상사가 승진에 실패하자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글귀의 주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신이 대학 때, 교수님께서 행복은 반드시 분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더랬다. 본인은 가족, 일, 취미 이렇게 세 가지에 행복을 분배해 놨기 때문에 하나가 무너지더라도 다른 것에 기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상사의 경우, 행복을 일에만 몰아넣은 나머지 그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본인도 무너져 버린 것이다.

돌아갈 곳을 만들지 않은 최후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 이 시대의 청년들은 거의 돌아갈 곳을 스스로 불태워 버린다. 취미가 뭐예요? 좋아하는 건 뭐예요? 라고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청년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스스로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 가끔씩은 추진력 발휘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스스로를 성실한 사람으로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에르난 꼬르데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아갈 날과 남은 선택지가 너무나 많은 ‘청년’이다.

사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걸까? 사회 또한 우리가 스스로 돌아갈 곳을 불태울 지경으로 밀어 넣는 일을 멈춰야 할 것이다. 숨 쉴 공간이 생길 때, 청년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돌아갈 수 있는 자신만의 안식처를 만들어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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