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서구 문명을 잉태한 불우했던 나라 

한 대형서점의 통계(2019년 전후)에 의하면 한국의 20~30대가 가장 많이 구입하는 외국소설은 헤세의 <데미안>이고, 40대 이후의 장년층이 구입하는 책은 <그리스인 조르바>라 한다. 책을 구입하는 것과 읽는 것은 완전히 별개이다. 책을 산 후에 읽지 않는 사람도 많다. 어쨌거나 <데미안>은 납득이 가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는 납득하기 쉽지 않다. 제목이 근사하고, 이국의 느낌을 물씬 주면서도 무언가 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준다고 느껴서일까? 아니면 터프가이의 삶에 동경을 느껴서일까?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근원지이지만 BC 388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아테네가 정복된 이후 사실상 세계무대에서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민족의 지배를 받다가 온전한 독립국이 된 것은 1830년이다. 특히 1453년부터 시작된 오스만제국(지금의 터키)의 지배는 무려 377년이나 이어졌으며 그 결과 그리스와 터키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처럼 이웃이면서도 숙명적인 적대국이다. 더구나 그리스는 기독교, 터키는 이슬람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기독교적 관점이 짙게 깔려 있으면서도 터키에 대한 반감이 곳곳에 나타난다. 여행 가이드북에 등장하는 에게해의 푸른 바다와 이국적인 흰 집들은 낭만을 불러일으키고,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일지라도 정작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그리 평온하지 못하리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알렉시스 조르바가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정체성을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다. 목사인지, 뱃사람인지, 선생님인지 불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직업을 소유했었던 만능 엔터테인먼트이다. 광부(시찰 나온 우두머리를 두들겨 팼다), 산투리(기타 비슷한 악기) 연주자, 도자기 제조자, 이 마을 저 마을 떠도는 행상, 크레타 독립군, 돌쪼시, 볶은 호박씨 장수, 대장장이, 밀수꾼, 전과자를 거쳤다([나]를 만난 후에는 고가 케이블 설계자가 된다). 별명은 ‘빵집 가래삽, 파사 템포(소금과 함께 볶은 호박씨), 흰곰팡이’ 등 여러 개다. 왜 그렇게 많은 직업을 거쳤을까?

그리스 유적 Ⓒ김호경

여자는 덫을 놓고, 사내는 그 덫에 걸린다 

35살의 [나]는 항구도시 피라에우스의 선술집에서 앞날을 막연히 설계하던 중에 60대 노인 조르바의 간택을 받았다. 조르바가 [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대뜸 물었다.
“여행하시오?”
이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의미가 깊다. 사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언제나 여행 중이다. 어디로, 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는가?도 지극히 중요하다. [나]는 크레타 해안의 폐광이 된 갈탄광을 임차했고, 그곳에서 돈을 벌 계획이었다. 조르바는 자신이 그 일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제안했다. 타협점을 찾은 두 사람은 배를 타고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협상을 마치며 조르바는 중요한 말을 던진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인간 = 자유’라는 공식이다. 비록 노동자로서 사용자의 감독을 받지만 자신이 떠나고 싶을 때 언제라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다. 조르바는 그렇게 60년을 자유롭게 떠다니며 살았다. 떠돌이 삶도 흥미롭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만난 여자들이다. “결혼을 했느냐?”는 질문에 ‘진실’로서 답한다.
“나도 개골창에 대가리를 집어넣었던 겁니다.”
개골창이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것인지, 결혼생활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결혼은 더러운 개골창에 자신을 투입하는 부정적 행위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함에도 조르바는 가는 곳마다 여자를 만나고, 성행위를 한다. 그 여자들은 대부분 술집 작부이거나 과부이거나 20살 이상 차이 나거나.... 그래서...“마을이 있으면 참한 과부는 있게 마련입니다”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여자를(덩달아 남자까지) 철저히 무시한다.
“여자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한다는 짓이 처음 만난 사내와 붙어 새끼를 까놓는 게 고작이오. 사내에게서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사내들이란 그 덫에 걸리고 맙니다.”

카잔차키스 Ⓒ김호경

인생은 탁상공론이 아닌 전력투구 

태생적으로 역마살이 끼었고, 여자와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조르바에 비해 [나]는 교육받은 지식인이고 교양인이다. 책과 철학자들의 언행에서 삶의 진리를 깨우치려 한다. 특히 공자, 석가의 말씀을 좋아한다. 조르바는 그런 [나]를 ‘두목’이라 부른다. 자신의 고용인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대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행위는 더 철저하게 비웃는다.
“두목의 책을 쌓아놓고 불이나 확 질러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두목은 아직 젊습니다. 하지만 지혜가 듬뿍 담긴 옛날 책을 많이 읽어서 약간 구식이 되었어요”
이 책 전체를 통하여 가장 가슴에 와닿는 진리이다. 카잔차키스는 작가이면서도 책이라는 물건에 대해,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곳곳에 피력했다. 나아가 조르바의 실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들려주어 탁상공론이 아닌 실사구시, 전력투구를 찬양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르바는 수도원을 세우고 싶어하는 [나]의 꿈을 비웃는다.
“수도원이 서면, 수도승 대신에 당신 비슷한 펜대 운전사들을 몇 끌어다 놓을 거고, 거기에서 밤이나 낮이나 뭘 끄적거리며 세월을 보낼 거요”
그런 부질없는 행위가 아닌 탄광 속에서 갈탄을 캐고, 저녁이면 술 한잔으로 피로를 씻고, 여자와 신나게 섹스를 즐기고... 그러다가 자유가 구속된다 싶으면 훌쩍 떠나는 삶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조르바는 여자를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자도 인간인가요?”
조르바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 책은 여성 편력 소설이 아닐까 의아심마저 든다. 고상한 [나]는 그 말을 들은 척 만 척한다. 조르바는 그런 나에게 핀잔을 준다.
“당신은 영원히 귀머거리 집의 대문만 두드리는군”
그렇다! 우리는 듣지 못하는 자의 대문만 줄기차게 두드려대는 엉터리 현대 속물 교양인인지도 모른다. 

* 더 알아두기

1. <그리스인 조르바>(1946)에는 수도원 살인사건이 등장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1980) 역시 수도원 살인사건이 주요 테마이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스땅딸의 <파르마의 수도원>(1839)은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를 배경으로 파브리스와 클렐리아의 사랑을 들려주는 소설이다.

2. 수녀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존 필마이어(미국)의 희곡 <신의 아그네스>(Agnes of God, 1982)가 가장 유명하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수녀원에서 아기를 낳고 목졸라 죽인 아그네스의 이야기이다.

3. 먼 곳으로의 유랑과 귀향은 호메르스의 <오디세이>가 출발점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오디세우스(Odysseus)의 10년에 걸친 귀향 이야기를 들려준다.

4. 모험을 그린 대표적인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허먼 멜빌의 <모비딕 白鯨>을 들 수 있다. R.L. 스티븐슨의 <보물섬>과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원래 어른용 소설이지만 동화(혹은 청소년용)로 읽힌다. 미셸 투르니에는 1967년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을 발표했는데 <로빈슨 크루소>를 새로운 관점에서 집필한 책이다.

5. 우주를 배경으로 한 모험소설은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 영국)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가 있다. 내용이 방대해서 인내심이 필요하다.

6. 터키인과 그리스인의 갈등을 묘파한 소설은 옛 유고슬라비아 작가 이보 안드리치(Ivo Andric)의 <저주받은 안뜰>이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은 고트홀트 레싱의 <현자 나탄>에서도 잘 드러난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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