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공모전 수상작]

1.

영화를 보면서 타인의 삶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영화의 순기능일 것이다. 대부분 영화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관객이 공감하기를 원하고, 그 만들어낸 이야기가 보통 타인의 삶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먼저, 영화 속 타인들이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흥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 흥미가 직접적인 동일시로 이어지면서, 타인을 위하는 게 곧 자신을 위하는 게 된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결국 공감한다는 것은 타인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것과도 같다.

물론 복병은 있다. 성찰의 과정이 도달한 결론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행위다. 성찰하는 행위 자체는 숭고하지만, 결론에 담긴 삶의 윤리는 개인의 것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그를 통해 자신의 살인행위에 정당성을 찾는다면 그는 미치광이일 테다. 이때 감독의 의도는, 그렇게 살인을 정당화하는 범인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것일 테다. 혹은 그가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인간이 아닌 그 주변부의 이야기를 탐색하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허나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주제는, 카메라라는 타인의 눈을 통해 그 모든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개인의 삶이 영화의 삶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영화가 무엇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두고 현상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다. 여기서 현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단어를 분해하면 현재의 이미지라는 뜻이 되는데, 두말할 것도 없이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있다는 점에서 시간선을 뜻한다면, 이미지는 빛을 받아들인 안구의 반사상이라는 점에서 공간선을 뜻한다. 요컨대 현상이라는 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일치를 통해 벌어지는 아주 특별한 순간이다. 영화의 삶이란 순간의 삶이며, 영화의 기능은 우리를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누군가는 물을 테다. 순간의 삶이 우리가 겪지 못할 이질적인 순간만을 묘사해야 하는가. 말하자면, 영화가 굳이 그렇게 고결한 자태를 뽐내야만 하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사의 어떤 순간들에 대하여, 숭고한 미학의 이데올로기를 덧붙이는 행위가 정말로 영화를 위한 것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영화를 미학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영화가 당신 삶의 어떤 순간이라는 점에서 인생이 꼭 아름다워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도 물을 수 있을 테다. 인생의 추한 순간이 기억 너머로 사라질 때, 그것은 따스한 추억으로 미화되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로 아름다운 순간이었는가.

언제가 유운성 평론가가 알랭 레네의 필모그래피를 두고서, 초중반에 비하면 많이 누그러진 그의 후반기 영화에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알랭 레네라는 노감독이 남들처럼 세월을 피해가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알랭 레네의 관심사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단지 그는 그가 생각하는 영화 도서관에서 대중영화 코너로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그러니까 알랭 레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단지 고개만을 돌렸을 뿐이다. 알랭 레네가 여전히 그곳에 있기에 그의 시공간은 고정되었고, 따라서 같은 순간에 머무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물을 수 있을 테다. 영화사의 순간을 시계열적으로 파악하던 우리의 관점이 잘못된 게 아니던가?

인생의 행복한 순간들. 삶의 부끄러운 순간들. 이것을 순차적으로 나열해보면 분명 시계열적으로 될 테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떠올리는 현재의 당신이 그런 순간의 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되었든 간에 심신은 이동하지 못한다. 당신은 그저 그런 순간을 주변에 나열해 둔 채로 고개를 돌리기만 할 뿐이다. 시계 안의 초침이 원형을 그리며 돌아가지만, 한 바퀴를 돌아오고 그러면서도 커다란 원의 일부를 옮겨 놓는다는 점에서 순간의 가능성은 이어진다. 말하자면 순간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점조직의 형태로 우리 안에 자생하는 것이다.

Ⓒ픽사베이

2.  

삶의 모든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특정한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전부 취할 수는 없으니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내려고 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삶의 특정한 순간을 두고 YES or NO라는 경합을 벌인다. 기억을 제물로 바쳐 다른 세상에 가거나, 아니면 그에 미련을 두고 이곳에 남거나. 그는 기억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것을 택하면서, 우리가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이 어떠한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기억은 아래로부터 적층되는 방식이니 연대별로 기억의 성분은 달라야 한다. 지질학을 공부하는 우리가 연대별로 기억의 화석을 발굴해 내듯, 그 기억 별로 생명체는 달라야 한다. 요컨대, 첫 데이트를 하던 순간과 헤어지는 날의 순간은 서로 달라야만 한다. 그리고 그곳과 이곳에 존재하는 동일한 것들, 알던 장소와 알던 사람에 관한 기억도 달라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기억을 소생하는 주체가 되어서 서로 다른 지질시대의 성분을 동일선에 놓는다. 나쁘게 끝난 연애도 첫 만남 때는 좋았다고 회상하는 모습에는, 그 끝과 시작을 양측으로 비교하는 현재의 생각이 담겨있다. 즉,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순간을 점조직의 형태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제에 따라 행동한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다 똑같아 보이지만 조금 전의 구름은 지금 내가 보는 구름과 다르다는 점을 생각한다.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다 똑같아 보이지만 눈앞의 물결이 지금 내가 보는 물결과 다르다는 점을 생각한다. 흘러가는 파도를 보면서, 다 똑같아 보이지만 눈앞의 일렁임이 지금 내가 보는 일렁임과 다르다는 점을 생각한다. 알랭 레네가 말하는 삶의 특별함이란 바로 그것이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순간이며, 그 순간을 끝없이 관통하는 동상이질의 풍경이 눈앞을 특별하게 한다.

만물은 변화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영화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캐스트 어웨이>다. 이 영화는, 끝없는 물결에 밀려오는 삶의 도구를 보여주면서 각각의 파도에 개성을 부여한다. 무인도라는 자아가 형상화된 공간에서 그는, 매일같이 밀려오는 삶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어느 날엔 택배가 올 것이고 어느 날엔 그렇지 않을 테다. 또는, 어느 날엔 사냥이 잘 될 테고 어느 날엔 그렇지 않을 테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이 순간에서 탈출하려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윌슨이라는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파생된, 순간을 탐사할 때 신체를 거치지 않는 외부주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로버트 저메키스는 그것과는 유사하면서도 반대로, <포레스트 검프>를 만들었다. 두 영화는 어떤 곳 안에 주인공이 속해 있다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두 영화에서 주체는 각각 국가와 개인의 삶으로 다르다. 이것은 작지만 큰 차이인데, <캐스트 어웨이>의 섬이 개인의 삶을 돌아보는 장소라면 <포레스트 검프>의 국가에서 주인공 검프는 국가의 삶을 돌아보는 요소, 기억 그 자체이다. 말하자면 그는, 알랭 레네식으로 말해 살아있는 기억이다. 동시에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려는 게 포레스트 검프라는 인물의 숭고한 삶이 아니라, 그를 통해 미국 역사의 주요한 순간들을 한 곳에 압축해 놓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로버트 저메키스 영화에서의 달리기는, 존 포드가 타고 달리던 말을 생각하는 면이 있다. 허나 실은 그 반대다. 모든 영화의 운동 이미지는 존 포드로부터 시작되었다. 존 포드의 위대함은 단순히 영화를 완성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어떤 기억이 우리에게 달려오는 듯 보인다는 점에 있다. 영화 속의 움직임이 기억의 유동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존 포드의 영화는 당시가 아니라 현대에 와서 더욱 고평가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달려갈 장소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계속해서 그를 떠올리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존 포드의 영화가 미국사의 초기를 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부국강병, 우익적인 요소라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는 미국인이면서도 영화인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운동 이미지가 누군가에게는 미국사의 주된 순간들, 누군가에게는 영화사의 주된 순간들, 누군가에게는 개인 삶의 주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이미 영화의 영역을 넘어가 있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다.

3.

La Vita e Bella. 이것은 당신도 잘 아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제목이다. 동시에, 영화는 삶이라고 말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열 중 하나이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가 어떻게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는지를 물을 때, 영화의 미학을 두고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말하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의 미학이라는 점에 있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 중 하나이지만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이야기의 매체가 아니라 영상 매체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는 현상, 즉 순간을 말하는 매체이기에 그는 이야기의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롭다. 말하자면 그것은 연대기가 아니라 연대이다. 적층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이 손을 맞잡는 연대이다.

기억은 어떻게 연대하는가. 혹은 인간은 어떻게 연대하는가. 적층되는 기억에서 그들은 손을 맞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의 토양은 죽은 것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기억을 두고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기억을 다루는 두 개의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만남의 순간을 보존하는 방법이 있으며, 두 번째로는 이별의 순간을 보존하는 방법이 있다. 첫 번째 경우에 우리는 만남의 순간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이별은 허락되지 않는다. 반대로, 두 번째 경우에 우리는 이별의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만남이 두려워진다.

우리가 방금 나눈 이야기는, 삶과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삶을 두고 교차하는 영화와 우리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조금 전의 문장을 다음처럼 치환해볼 수 있다. 현상은 어떻게 연대하는가. 영화는 어떻게 연대하는가. 적층되는 쇼트에서 그들은 손을 맞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잘린 시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린 시간으로 만들어진 현상을 두고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쇼트를 다루는 두 개의 편집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이미지가 맞붙는 순간에 치중하는 방법이 있으며, 두 번째로는 쇼트의 절단면을 보존하는 방법이 있다. 첫 번째 경우에 우리는 이미지의 충돌을 계속해서 유도한다. 이때 그 충돌과의 이별은 허락되지 않는다. 반대로, 두 번째 경우에 우리는 쇼트의 절단면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미지의 충돌이 두려워진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그 이미지를 만나고 떠나보내는 차원의 면이 순간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쇼트를 목격할 때가 순간이기도 하지만, 쇼트와 쇼트의 결합에서 그들은 매 순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연대에 관해 물을 수밖에 없다. 이질적이면서 착 달라붙는 쇼트가 있고, 유기적이면서도 어감이 좋지 않은 쇼트가 있다. 한국 영화로 치면 그 두 개는 박찬욱과 봉준호 정도의 차이이다. 전자는 잘 맞지 않는 것들로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과잉을 이루고, 후자는 이상한 것들을 유착시켜 놓은 종양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 또한 그런 식으로 법칙을 이루기에, 우리는 각각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운동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운동 이미지를 단절한다는 것은 무엇을 보존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과 관계를 맺는지, 무엇과 관계를 끊는지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당신이 돌아가는 선풍기를 보면 그는 이제 현상으로서 당신과 맺어졌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일시적으로 관계는 끊기지만 그럼에도 같은 순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영화에서 목격하는 현상은, 그것이 영화 속의 쇼트와 연대하면서 만들어가는 그들 세계의 지구본인 셈이다. 분명 이 지구본을 돌리면 영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만나게 될 테다. 하지만 어느 동요처럼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지는 못할 테다. 왜냐하면 고개를 돌리면 그 반대편의 사람과는 단절되기 때문이다.  

하지면 그럼에도 영화는 살아간다. 이 말은 사람이 살아간다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쓰였다. 우습게도 영화는 시간에 종속된 우리가 만들어냈지만, 반대로 그곳의 시간은 자유롭다. 우리의 시선이 닿는 스크린 위가 현실과 영화 간의 현상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당신과 맺어지는 운명과도 같은 순간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연이라는 단어를 쓸 때, 하나의 행성에서 당신과 지금 이곳 이 순간에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식의 낭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길을 가다 마주한 낯선 이와 친구가 되듯이, 영화에 불쑥 들어온 쇼트와 맺는 관계가 정말로 우연적인 것이라는 점은 감동적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을 목격하는 것은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거리의 한 풍경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세계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떤 이가 당신에게 기억되는 순간, 그것은 세계 전반에 관한 태도로 확장된다. 결국 우리가 영화에 돌려줄 수 있는 호혜적인 행위는 그들을 감염시키는 것이다. 최초의 투입구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세계와 우리 사이를 현상시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세계와 우리가 종양처럼 눌어붙을 때, 영화는 비로소 당신의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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