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논객칼럼=이호준] 강연 차 춘천에 다녀오는 길, 가평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들른 뒤 차를 후진하는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시쳇말로 ‘쎄하다’고 하지요. 이런! 제 차 앞범퍼가 옆 차의 뒷범퍼를 슬쩍 비비고 있었습니다. 운전을 시작한 뒤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처음입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극도로 지쳐 있는 심신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찰에서 최근 큰 행사를 치렀는데 온갖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육체가 힘든 건 그럭저럭 견디겠는데, 사람과의 갈등은 인내의 임계점을 넘나들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녹초가 돼 있는 상태에서 오래 전 약속한 강연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더구나 절로 빨리 돌아가야 할 상황이라 마구 서둘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를 다 동원해도 사고를 설명할 설득력은 약했습니다. 어른들 말로 뭐에 씌었던 거지요.

사고를 확인하는 순간, 조금 전 춘천에서 주고받은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오니 춘천에 사는 시인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차 한 잔씩 하는 중에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 시인의 부인이 고급 외제차를 살짝 긁었는데 무려 1800만원의 견적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험처리를 했더니 보험료가 200만 원 이상으로 올랐다던가요? 끔찍한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신음처럼 내뱉었습니다.

“1800? 그게 말이 돼? 무려 내 차 값의 여섯 배네?”

작년에 인제 예술인촌에 들어가면서 300만원에 산 중고차를 여전히 타고 있으니 언뜻 비교가 됐던 겁니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습니다.

사고를 확인하자마자 그 대화가 생각나면서 덜컥 겁이 났습니다. 차에서 내려 보니 옆 차 범퍼에 상처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조금 우그러진 것도 같았지만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뿔싸! 더 큰 문제도 있었습니다. 피해 차가 바로 조금 전에 화제가 됐던 그 외제차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심장은 쫄밋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머릿속에서 ‘1800’이라는 숫자가 봄 논의 올챙이처럼 와글거렸습니다. ‘돈’은 곧잘 가난한 이들에게 과장된 올가미가 되고는 합니다. 차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 뒤 50대쯤의 남자가 나타나더니 물끄러미 자신의 차에 난 상처를 살펴봤습니다. 그가 묵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잠깐 웃었던 것도 같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힐난하거나 화를 내는 게 정상일 텐데…. 저는 욕을 먹은 것보다 더 당황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어떻게 처리해드리면 좋을까요?”
“글쎄요… 이게 지워지려나 모르겠네. 카센터에 가볼 테니 전화번호나 주고 가세요.”

명함을 건네고 다시 출발했지만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견적이 많이 나오면 어쩌지? 몇 십만 원 선이야 어떻게 해보겠지만, 그 선을 넘으면 보험처리를 해야겠지? 별별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픽사베이

그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카센터에 들를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연락 오기를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토요일에도, 카센터가 문을 여니 전화가 오겠지 싶었는데 그냥 지나갔습니다. 아! 주말이 바빠서 월요일에 맡기려나 보다 했지만 역시 허탕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의논해봐도 불길한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 차는 부분 도색이 안돼요. 전체를 도색하려니까 비용이 많이 나오는 거예요.” “조금만 상해도 범퍼를 통째로 갈아야 돼요. 저도 500만원 물어줬어요.” 돕자고 하는 말인지, 불안을 부추기는 말인지….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은근한 기대도 생겼습니다. 어쩌면… 카센터에 가서 간단하게 처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비용이 좀 들었는데, 허름한 차를 타고 다니는 자에게 무슨 돈이 있으랴 싶어서 자가 부담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 정도로는 마음에 얹힌 돌덩이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월요일이 지나고, 또 화요일이 지나가더니 결국 수요일이 됐습니다. 그날까지 그냥 지나가면 잊어버릴 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녁 무렵, 낯선 전화번호가 떴습니다. 제가 사고 낸 차의 주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 가평휴게소에서….”
“예, 안녕하세요? 그러쟎아도 전화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바빠서 미루다가 오늘 카센터에 가서 수리를 했습니다. 19만원 달라고 하네요. 입고시키면 그보다 훨씬 더 나오겠지만,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간단하게 손만 봤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고맙습니다. 바로 입금시켜드리겠습니다. 계좌번호 좀 부탁드립니다.”

상황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마무리됐습니다. 며칠간 마음 졸이게 했던 ‘1800만원’의 공포가 19만원으로 끝난 거지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분의 말대로 정식 입고를 해서 수리했다면, 남들이 그랬듯 최소 몇 백 만원을 부담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보험처리를 한다고 해도 보험료가 오르는 건 분명하고요.

그런 내용을 SNS에 올렸더니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행이다” “훈훈하다” “정말 좋은 상대를 만났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신이 겪었던 억울한 사연이 줄줄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비싼 차를 타는 사람이 쩨쩨하게 19만원을 청구하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라도 보상하고 마무리 지어야 제 마음이 깔끔해지니까요. 그 분도 아마 거기까지 배려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 세상은 훨씬 더 따뜻해지니까요. 아직은 살만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