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성의 일기장]

[청년칼럼=김우성]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테니스 대회 ‘윔블던’. 매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까다로운 규정으로 유명하다. 관중이 다리를 꼬고 경기를 관람하면 덩치 큰 보안 요원이 손짓으로 경고한다는 점. 로얄 박스(저명한 인사들을 위한 특별석)에 앉는 사람은 한여름 낮에도 무조건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점. 경기장 내에서 상업 광고 게시는 금지되어 있다는 점.

다른 대회와 달리 윔블던은 왜 이렇게 엄격한 잣대를 내세우는지.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다른 대회가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어린이, 또는 아이돌 그룹을 보면서 환호하는 청소년 느낌이라면, 윔블던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 이미지다. 자유롭고 편하게 즐기면 어디 덧나나?

윔블던을 대표하는 규정 한 가지를 꼽으라면 선수들이 흰 복장을 착용해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상의, 하의는 물론, 신발과 헤어밴드, 모자까지 몸에 닿는 모든 것은 하얀색이어야 한다. 진정한 ‘백(白)의 민족’이 여기 있었구나. 2013년에는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신발 밑창이 주황색이어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징하다, 징해. 그 정도 하얗게 꾸몄으면 됐지, 도대체 어디까지 바라는 걸까. 흰 옷을 입으면 속이 다 비친다는 이유에서 일부 선수들이 대회 측에 항의한 적이 있었고, 실제로 미국의 안드레 아가시는 복장 규정에 불만을 품고 출전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세계적인 대회라 해도 모두가 마냥 즐기기는 어렵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윔블던은 선수들과 팬들이 가장 참가하고 싶은 대회 0순위로 손꼽힌다. 어르신의 쓴소리와 같은 지침을 선수, 관중 모두에게 강요하는데도? 그럼에도 센터 코트의 잔디를 밟고 싶어하는 선수들. 거액의 티켓이 다 팔려 아쉬워하는 팬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러는 걸까. 쌀쌀맞게 구는 이성에게 안달복달하며 더욱 매달리는 것처럼. 마치 윔블던은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꼬우면 오지 말든가.”

갑과 을의 관계. 칼자루를 잡은 사람과 칼날을 쥔 사람의 힘겨루기. 윔블던 vs 선수 및 팬의 구도가 이런 모습이다. 상대방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아도, 심지어 떠나간다 해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갑 중의 갑. 외부 영향에 흔들리지 않은 채 냉정하게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는 윔블던. 지조있는 모습이 멋있다고 해야 하나. 대회 측은 아쉬울 게 없다는 식으로 나온다. “너희들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대회다. 불만 있으면 오지 마라, 오고 싶어 하는 사람 널렸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많은 선수들과 관중은 대회 규정을 고분고분 따른다.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소비하고 불편한 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윔블던은 참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 아쉬운 사람이 묵묵히 상대방의 요구를 따르는 게 일반적이니까.

인간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때로는 타인에게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함께 식사하자고 제안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상대방으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다. 먼저 연락한다는 건 그만큼 더 아쉽다는 뜻. 여기서 말하는 아쉬움은 그리움, 사랑, 부탁, 이윤 추구, 도움 요청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통 더 많이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부탁할 일이 있는 사람이 먼저 연락하니 말이다.

부모, 자식 사이에서는 부모가 더 아쉬운 입장이다. 부모를 향한 자식의 사랑도 존재하지만 그 이상으로 부모는 자식을 더 사랑할 게 분명하다. 우리 부모님이나 주위 아버지, 어머니를 지켜보면 자식이 아무리 정성 다해 부모님을 공경해도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게 아닐까. 자식이 부모보다 힘이 더 강해서 이기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져주는 게 정상이니까.

남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많이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먼저 문자 보내고 전화를 건다. 상대방에게 먼저 연락하는 게 마치 굽히고 들어가는 것 같아 자존심 상한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더라도 애써 씩씩하게 먼저 마음을 전한다는 건 수모를 감내하면서까지 상대방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니, 내세울 자존심도 없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자존심이 웬 말이냐.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물속에 뛰어들기 전에 ‘이 옷 비싼 거라 젖으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진심으로 아끼는 대상 앞에서는 나름 중요하게 여겨왔던 가치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다 못해 무의미해진다. 아쉬운 마음에 이렇게까지 먼저 다가갔는데 과연 상대방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감동할까, 귀찮아할까?

갑과 을 중에서 갑이 되기를 꿈꾸는 건 당연하다. 나도 그렇다. 인간관계에서든, 특정 상황에서든, 언제나 주도권을 쥔 입장이었으면 좋겠다. 아쉬운 소리 하기 싫으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어쩔 수 없이 종종 을이 된다. 가끔 주위의 아끼는 사람에게 먼저 연락을 한다. 만나서 같이 밥 한 번 먹자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간절하게 매달리기도 한다. 나 이거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고. 나중에 자식을 낳아 아빠가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큰소리치는 자식에게 말대꾸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먹고 싶다는 것 일일이 다 사주는 아빠가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김우성

낮에는 거울 보고, 밤에는 일기 쓰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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