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서정의 글우물]

[청년칼럼=허서정] ‘미쳤습니까 휴먼?’ 관자놀이에 갖다 댄 두 개의 손가락과 45도 각도로 미묘하게 내리깐 시선. 아는 사람은 알 만한 찰진 드립과 어우러진 로봇 사진 한 장이 유행처럼 번진 지 오래다. AI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기 시작한 이 ‘짤방’은 태초에 낚인 사람을 놀리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이를테면 매우 강력한 혐오성 또는 어그로성 제목이 붙은 게시물을 클릭하면 해당 사진이 드립과 함께 노출되는 식이다. 아뿔싸, 당했다! 라는 인지 작용이 일어남과 동시에 로봇의 비웃는 표정과 뇌는 있니? 라고 묻는 것 같은 손가락 제스처를 보고 기분이 확 상하는, 우리의 이름은 ‘인간(human)’이다.

Ⓒ픽사베이

인공지능은 언제부터 인간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을까.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패배한 2016년부터? 확실히 전 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안긴 놀라운 사건이긴 했지만 그것이 최초는 아니다. 1943년부터 인공 뉴런 모델로 연구가 시작되었고 인공지능이라는 용어 역시 1956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존 매카시(John McCarthy)가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AI는 눈부신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실로 가공할 속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각종 분야에 스며드는 중이다. 의료, 법조계는 물론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예외는 없다. 가까운 미래에 기계가 대체할 인간의 직업이 점쳐지고, AI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싱귤래리티(Singularity)’가 늦어도 2045년에는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이 이미 보편화된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져 있을 만큼 변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인간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성싶다. 로봇에게 지배당하는 SF 시나리오가 단지 ‘공상’과학인가에 대해서.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저서 『느낌의 공동체』에서 인간의 세 가지 권능이 사유, 의지 그리고 느낌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어감의 측면에서 볼 때 흔히 말하는 ‘감정’은 사유보다 의지와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사람이기에 생각하고 느낀다. 감정이란 결국 외부의 자극으로 발현되는 몸의 움직임과 변화다.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넘치고 자극은 늘 과잉인 현대 사회에서는 감정도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은 누구도 어려운 감정을 싸안고 끙끙대거나 고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화가 났음을 대놓고 표출하자면 분노조절장애라는 평가를 감수해야 하며 나를 드러내거나 감정에 솔직할라치면 ‘진지충’이라는 조롱이 들려온다. 구구절절 말을 고르느니 센스 있는 이모티콘 하나가 낫고, 진심을 전할 때도 적절한 이미지 하나가 열 손편지 안 부럽다.

하루를 살아내기도 버거운 와중에 굳이 남의 마음에 관심을 쏟고 교류와 소통에 힘써야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팍팍한 밥벌이의 일상이 남의 마음은커녕 내 마음조차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심리학 도서가 베스트셀러인 이유다. 어른이 되었어도 설명하기엔 어려운 감정을 두고 책을 찾아 이해해 보려는 시도는 바람직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 경험일 뿐이다. 간접 경험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노력 없이는 단순히 이해하기에 그친다.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이 당연한 논리가 뇌와 근육에 통용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인 감정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 속에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표현하길 꺼려하고, 이는 다시금 불안정한 상태에 대한 면역력을 약화시킨다.

인간이 감정과 사유라는 고유한 능력을 천천히 잃는 동안 AI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인간이 던진 칭찬에 얼굴을 붉히고 유머를 곁들이는 수준이 되었다. 이런 판도가 뒤바뀌지 않는다면 아마도 사람답지 못한 사람과 사람보다 나은 로봇 사이의 격차는 가속화될 것이다. 아직까지 인공지능에게 감정을 인지시킬 수는 있어도 이해시키기는 어렵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또한 로봇이 진정한 의미로 공감능력을 갖출 날은 요원하나, 세상을 뒤흔드는 혁신에 대해서는 늘 기대와 염려가 병존해 왔다.

어디를 봐도 기계인 로봇이 ‘미쳤습니까 휴먼?’ 이라고 하면 웃던 우리는,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흡사한 AI가 말없이 묘한 비웃음을 보일 때에도 웃을 수 있을까? 1970년에 소개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를 볼 때, 그것이 인간과 더 많이 닮을수록 호감도가 높아지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낌)’ 이론은 디스플레이 기술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헷갈릴 정도로 똑같이 만들면 다시 호감도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분히 외관적인 측면에서만 그러하다.

인공지능이 상용화된 미래를 그리며 기계가 더욱 인간 같아지거나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고 기계처럼 변화하리라고 양극단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영역에서 잘하는 부분을 담당하면 된다. 다만 이 세계가 염두에 둘 것은 기껏 머리 싸매고 탄생시킨 피조물에게 정복당하지 않도록, 고등동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감정과 사고, 그리고 공감능력을 단련하고 지켜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깊고 진지한 사유에서 우러난 인간만의 시각과 해석은 창조성으로 결실을 맺어 기계를 기계로서 존재하게 할 것이다. 

허서정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기고자 펜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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