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정조의 여인들을 통해 살펴보는 조선의 역사

[논객칼럼=김희태]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누구를 중심에 두고 보는지에 따라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가령 조선의 역사를 다룰 때 주로 왕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만, 반대로 왕비 혹은 여인을 중심에 두고 바라보면 같은 사건과 인물을 다루더라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궁궐 내부에서 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꽃들의 전쟁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사건이자, 해당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조의 경우 여인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았던 왕 가운데 한 명이기에 정조 시대의 여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건릉(健陵) Ⓒ김희태

크게 정조의 여인들은 ▲ 왕비 효의왕후 김씨(1753~1821, 이하 효의왕후) ▲ 의빈 성씨(1753~1786) ▲ 원빈 홍씨(1766~1779) ▲ 수빈 박씨(1770~1822) ▲ 화빈 윤씨(1765~1824)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정조와 함께 묻힌 효의왕후와 남양주에 위치한 수빈 박씨의 휘경원(徽慶園)을 제외한 3명의 후궁(의빈 성씨, 원빈 홍씨, 화빈 윤씨)은 현재 서삼릉 내 비공개 지역인 빈과 귀인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정조는 왕비인 효의왕후와 원빈 홍씨의 경우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후궁 소생의 ▲ 문효세자(=의빈 성씨, 1782~1786) ▲ 순조(=수빈 박씨, 1790~1834, 재위: 1800~1834) ▲ 숙선옹주(=수빈 박씨, 1793~1836) 등의 자녀를 두었다.

 

서삼릉에 소재한 화빈 윤씨의 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자녀를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희태
남양주 휘경원(徽慶園),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의 원소다. Ⓒ김희태

이외에 <조선왕조실록>에는 화빈 윤씨가 임신해 산실청이 세워진 기록이 있어 자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한중록>을 통해 정조와 효의왕후의 관계가 원만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따라서 정조의 경우 후사를 위해 후궁 간택과 승은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친밀감 혹은 정치적 환경에 따라 효의왕후와 후궁의 관계는 서로 다른 결말을 맞게 된다. 다만 효의왕후는 정조가 즉위한 뒤 왕비로 책봉이 되었고,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윗전을 공경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1821년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정조와 함께 합장릉으로 조성이 되는데, 이곳이 바로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한 건릉(健陵)이다.

창경궁 집복헌(集福軒),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김희태

정조의 여인 중 수빈 박씨는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원자를 낳았는데, 이가 바로 순조(재위 1800~1834)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조가 아들의 탄생을 누구보다 바랬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는 문효세자가 요절한 상황이라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원자가 탄생한 이후 정조는 “나라의 형세를 유지해나갈 기쁨이 있다”며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수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치세를 누리는 것을 지켜본 유일한 후궁으로, 정조의 여인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아들의 치세를 지켜본 수빈 박씨는 1822년 12월 26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최초 수빈 박씨의 원소인 휘경원은 양주 배봉산에 조성되었는데, 그 위치는 영우원(=사도세자)의 왼쪽에 있었다. 이와 함께 사당인 경우궁(景祐宮)을 지어졌고, 현재 칠궁(七宮)에 합사되어있다. 이후 휘경원은 순강원(=인빈 김씨의 원소) 오른쪽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정조가 사랑했던 여인, 의빈 성씨와 <어제의빈묘지명> 

정조(재위 1776~1800)의 여인들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의빈 성씨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정조의 경우 여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인 적이 드물기에, 유독 의빈 성씨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대한 모습은 여러모로 화제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의빈 성씨는 정조의 승은을 거절한 것에 그치지 않고, 무려 15년을 기다리게 했던 일화는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서삼릉 내 빈과 귀인 묘역에 자리한 의빈 성씨의 묘 Ⓒ김희태

이 때문이었을까? 의빈 성씨가 세상을 떠난 뒤 정조는 친히 <어제의빈묘지명>을 썼는데, 해당 기록을 읽다보면 비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의빈 성씨는 정조에게 있어 단순한 후궁이 아닌 국정의 조력자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비인 효의왕후와의 사이도 좋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기에, 여러모로 정조와 의빈 성씨의 관계는 일반적인 왕과 후궁의 관계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의빈묘의 묘비, 정조와 의빈 성씨의 관계는 왕과 후궁의 관계를 넘어선 사랑하는 여인이자, 조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이러한 의빈 성씨는 정조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옹주의 경우 첫돌을 넘기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던 1782년 마침내 첫 아들인 문효세자가 탄생하며, 정조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1786년에 문효세자가 요절하면서 정조에게 큰 아픔을 안겼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 정조가 홍화문 밖까지 나와 곡을 한 뒤 전별했음을 알 수 있다. 더 안타까운 점은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빈 성씨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심지어 의빈 성씨는 세상을 떠날 당시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삼릉 효창원(孝昌園)의 전경, 최초 서울 효창공원에 소재했으나, 1944년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김희태

이러한 의빈 성씨의 묘는 최초 아들인 문효세자와 함께 효창공원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위치는 문효세자의 효창묘(=효창원) 왼쪽 산등성이에 위치했다. 어쩌면 죽어서나마 ‘의빈 성씨-문효세자’ 모자가 함께 있기를 배려한 측면과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묘를 조성하기를 원했던 정조의 의중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44년, 효창원(孝昌園)과 의빈묘(宜嬪廟)는 효창공원을 떠나 현재의 위치인 서삼릉으로 이전이 되었다. 현재 효창원의 경우 공개되어 일반인들의 관람이 가능한데 비해, 의빈묘의 경우 비공개 지역인 빈과 귀인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 인명원에서 원빈묘로 격하된 이유는? 홍국영의 누이동생인 원빈 홍씨

서삼릉의 빈과 귀인 묘역에 자리한 또 한명의 정조의 여인 중 원빈 홍씨의 원빈묘(元嬪墓)가 있다. 원빈 홍씨는 당대의 권력자인 홍국영의 누이동생으로, 간택을 통해 빈으로 책봉이 된 경우다. 이는 정조가 왕위에 올랐음에도 왕비인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하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데, 특히 왕의 경우 후사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 원빈 홍씨의 간택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여기에는 홍국영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홍국영의 입장에서는 빈으로 간택된 누이동생이 아들이라도 낳을 경우, 서열상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이 경우 홍국영은 외척이 되어 더 막강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기에, 자신의 누이동생을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삼릉 내 빈과 귀인 묘역에 자리한 원빈묘의 전경 Ⓒ김희태

한편 가례를 올릴 당시(=1778년) 원빈 홍씨의 나이는 14살로,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1779년 5월 7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홍국영은 원빈 홍씨의 죽음 이후에도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완풍군)을 죽은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러한 홍국영의 행동은 탄핵의 빌미가 되었고, 홍국영의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한편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난 뒤 최초 인명원(仁明園)으로 불렸다. 통상 원(園)은 세자나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어머니 등 제한된 신분에서 붙여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조치는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 그럼에도 홍국영이 권력을 가진 동안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으나,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인명원의 격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원빈묘의 묘비 Ⓒ김희태

계속되는 상소에 정조는 처음에는 난색을 표시하다가 결국 인명원(仁明園)을 원에서 묘로 강등하는 것을 허락하게 된다. 그렇게 묘로 격하되면서 이에 걸맞지 않은 제향공간과 석물 등의 훼철이 이루어졌고, 묘비 역시 고쳐 세웠다. 최초 원빈묘의 위치는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고려대학교 내에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애기능 캠퍼스가 있는데, 애기능이 옛 인명원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은 표석이 세워져 이곳에 인명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다 1950년 6월 13일 지금의 서삼릉 내 비공개 지역인 빈과 귀인 묘역으로 이장이 되었다. 

최초 인명원이 있었던 고려대학교 애기능 캠퍼스 Ⓒ김희태
인명원터 표석 Ⓒ김희태

어떻게 보면 원빈 홍씨의 삶은 의빈 성씨와는 많은 대조를 이루는데, 단적으로 왕비인 효의왕후와의 관계만 봐도 그렇다. 의빈 성씨의 경우 정조의 승은을 15년이나 거절했는데, 만약 의빈 성씨가 여느 여인들처럼 야심이 있었다면 이런 모습은 나오기가 어렵다. 심지어 <어제의빈묘지명>을 보면 승은의 거절 이유가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효의왕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의빈 성씨의 행동이 당연히 좋게 보인 것이다. 따라서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의 관계는 통상적인 ‘왕비-후궁’의 관계가 아닌 서로를 위했던 친밀한 관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원빈묘의 상석, ‘원빈홍씨지묘(元嬪洪氏之墓)’가 새겨져 있다. Ⓒ김희태

반면 원빈 홍씨의 경우는 의빈 성씨와는 다른 경우인데, 정작 효의왕후와 원빈 홍씨의 갈등 보다는 홍국영의 무리한 욕심이 불러온 정치적 배경을 눈 여겨봐야 한다. 당연히 효의왕후의 입장에서는 왕비인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로 읽힐 수 있는 이러한 간택에 대해 심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실제 원빈 홍씨가 입궁한 뒤 불과 1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홍국영은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지목했고, 효의왕후와 홍국영의 갈등은 <한중록>에도 등장한다. 따지고 보면 이는 원빈 홍씨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원빈 홍씨를 통해 권력을 탐했던 홍국영의 욕심이 만들어낸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원빈 홍씨의 삶을 통해 권력의 민낯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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