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쇼!사이어티]

‘민주주의는 지극히 합법적으로 무너진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그러했다.’

20년 넘게 민주주의가 붕괴한 나라들의 공통점을 연구한 하버드의 스티븐 래비츠키 교수가 저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죽는가>에서 내린 결론이다. 그는 1900년대 초중반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그 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아르헨티나의 페론 부부, 21세기의 푸틴과 도널드 트럼프 등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스트들의 공통점을 연구했고 그들의 연설 속에서 몇 가지 일정한 패턴을 발견했다. 민주주의 선거와 언론에 대한 불만,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부정, 폭력에 대한 옹호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폭력적이고 선동적인 독재자일지라도, 그들은 모두 놀랍도록 합법적이었다. 히틀러도 트럼프도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고, 푸틴과 차베스가 골치 아픈 언론들을 잠재울 때 써먹은 ‘고강도 세무조사’도 합법적인 수단이었다. 그래서 래비츠키는 결론 내린다. ‘법이나 제도는 죄가 없다. 정치 행위자들, 즉 정당과 정치 지도자들이 포퓰리즘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픽사베이

요즘 한국사회에서 ‘개혁 담론’이 진행 중이다. ‘검찰 개혁’, 또한 ‘그 다음은 언론개혁’이라는 식이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과연 법/제도의 문제일까? 물론 제도 개혁은 필요할 수 있다. 특정 영역에 권한이 과도하게 주어졌고 그걸 견제해야 한다면 기본적인 개편은 논의해봄직하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권한을 남용해온 플레이어들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예컨대 검찰개혁을 보면, 모두가 ‘정치 검찰’을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람들, 즉 갈등문제가 생기면 협상과 타협할 생각은 안하고 고소장을 남발해온 정치, 언론, 시민단체들의 ‘민주주의의 사법화’ 관행도 지적해야 한다. 이런 악습을 바꾸지 못한다면 제도개혁은 소용없다.

언론개혁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2014년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언론의 신뢰도는 추락했다. 그것은 불법은 아니었지만, 언론의 못된 관행 탓이었다. 오로지 조회수, 속보 경쟁만을 우선한 듯 흉측한 보도들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나 뜨내기 논객의 발언을 검증없이 ‘복붙’하는 ‘따옴표 저널리즘’, 희생자의 일기장을 들추고 자식 잃은 유가족에게 심정을 묻는 잔인한 ‘비윤리 보도’가 가득했다. 언론사들은 앞서 ‘재난보도윤리’, ‘언론윤리’ 등 업계의 도덕률을 만들고, 보강해왔지만 대부분 언론인들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배했다. 어차피 모두가 트래픽 경쟁의 공범인 와중이어서 ‘언론윤리’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 속에서 JTBC의 급부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고작 기자 100명 남짓한 작은 종편이 무려 3년 연속 언론 신뢰도 1위, 지상파3사를 위협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분석했고, 결론은 단순했다. JTBC는 언론의 기본역할, 즉 ‘사실취재와 교차검증’ 그리고 언론윤리를 준수하는 ‘페어플레이’에 충실했을 뿐이다. 시청자들도 공적인 이슈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검증해주는 뉴스룸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최근 조국 사태에 대한 언론불신은 또 다른 언론 비윤리에서 비롯한다. 기성언론들은 대부분 ‘검찰의 정보 흘리기 -> 검찰 출입처 기자들의 받아쓰기 -> 검증이 부족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보도’하는 공통된 보도패턴을 보였다. 전형적인 ‘따옴표 저널리즘’이었다. 검찰발(發)이 아닌 다른 증언이나 자료는 기성언론에서 보기 힘들었다. 그러자 시민들은 조국 일가의 금융자산관리사 등 주변인들을 교차 검증하는 유튜브, 팟캐스트의 콘텐츠를 더 신뢰하게 됐다. 언론이 출입처 시스템에 과하게 의존하고 게이트키핑, 교차검증에 소홀해버리자 시민들은 곧장 대안언론을 찾아 떠나버렸다. 이것이 언론의 법, 제도의 문제일까? 전혀 아니었다. 지금의 언론의 위기는 전적으로 언론이 스스로 초래한 문제이다.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은 한 편의 기사에 최소한 3명으로부터 사실을 교차 검증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익명의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한 구절을 부풀려서 기사를 작성하고 ‘기사등록’ 버튼을 누른 언론인과 편집시스템은 반성해야 한다. 광장에서 ‘검찰 다음은 언론개혁’ 구호가 울리게 만든 것은 그런 잘못된 관행이 누적된 결과로 봐야 한다.

헌법에 ‘시민의 알권리’란 없다. ‘표현의 자유’가 있을 뿐이다. 언론계는 시민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저질 기사와 퍼나르기를 정당화해온 업계 관행을 고백하고, 말뿐이던 언론윤리를 구체적으로 저널리스트 윤리교육 및 업계 비평 시스템에 활용해야 한다. 예컨대 언론사마다 ‘미디어 비평’ 코너를 활성화할 수 있다. 서구 언론사들은 서로의 보도관행과 오보 사건 등을 사회/문화면 만큼 큰 비중으로 다룬다. 동종업계라고 쉬쉬하지 말고, ‘미디어오늘’이나 ‘민주언론시민연합’처럼 오보와 관행을 과감하게 비판한다면 자정작용이 일상화할 수 있다. 또한 올해부터 한국농구협회가 플라핑(마치 파울 당한 것처럼 과장된 연기하는 행위) 선수의 명단과 영상을 매달 공개하듯, 한국언론협회 등에서 언론사들의 반칙행위를 매주 공개하는 것도 하나의 자정방안이 될 수 있다.

언론개혁은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종사자들의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표현의 자유를 법과 제도로 억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지난 독재와 비민주 속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피땀흘려 지켜낸 소중한 성과이지, 언론의 소유물이 아니다. 결국 언론 신뢰도는 스스로 지켜내야 한다. 변화하는 콘텐츠 소비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보다 언론다워질 수밖에 없음 또한 명심해야 한다. [오피니언타임스=이성훈] 

 이성훈

20대의 끝자락 남들은 언론고시에 매달릴 때, 미디어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철없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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