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치당 영화당]

[오피니언타임스=숲속의참치] 게임 원작의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은 <반교 : 디텐션>으로 게임 제목을 그대로 옮겼다. 원작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지만 본래의 제목이 적절하기에 손댈 이유가 없기도 하다. 반교(返校)는 ‘학교로 돌아오다’라는 뜻이고 디텐션(Detention)은 ‘구류(교도소 또는 경찰서 유치장에 구치하는 형벌)’라는 뜻인데, 제목처럼 학교에 구류되는 게 작품의 줄거리이다. 작품을 관람한 이들의 반응이 대체로 좋아서 게임 원작의 다른 영화와 비교되는 모양이다. 만화나 소설을 원작으로 크게 성공한 영화들은 있지만, 게임을 원작으로 성공한 영화가 거의 없기에 이런 평가가 더 주목된다.  

하지만 나는 게임 원작 영화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본작의 성공을 두고 특별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원작으로 한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며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로 변환될 때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해졌을 뿐이다.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게임을 하였고 비슷하지만 다른 사례가 생각났다.

게임 원작의 영화 ‘반교’ 스틸컷 Ⓒ네이버영화

첫 번째로 <사일런트 힐>이다. 여러 편이 출시된 이 게임의 줄거리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주제를 관통한다. 원죄(Sin)라는 종교적 사례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이 작품 시리즈에서 우리는 영원함을 본다. 그들은 천국에도 지옥에도 입국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중간계적 개념이 있음에도 원죄를 말하는 몇몇 작품에서는 ‘그곳에서의 추방’이라는 의견을 내세운다.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은 이가 갈 수 있는 건 아무 곳도 없다고 말이다. 죄를 지었기에 당연히 천국에는 갈 수 없는데 여기서 핵심은 지옥조차 그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지옥에는 죄인들이 가지만 그의 죄는 지옥의 범주를 훨씬 상회하기에 입국을 허용할 수 없다. 소위 말하는 ‘구천을 떠돈다’는 식의 형벌인 셈이다. 이때 그 목적은 안식의 부재를 유발한다. 잠들어야 할 영혼이 잠들지 못하는 좀비처럼, 명계의 영혼을 위해 ‘돌아올 육체(미라)’를 만들었던 고대 이집트의 사례처럼, 우리 인간이 반드시 돌아가야만 할 곳으로 지정되는 집이 그들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집이라는 안식처는 추상적 개념이다. 마음이 붕 떠 있으면 불안해지듯, 우리는 늘 안정을 추구한다. 변화가 일어나면 그게 새로운 시도이든 아니든 간에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런 불안이 계속되다 보면 종국에는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 현실에 함께하지만 영혼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단어가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이기에 하지 않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때 그들의 영혼은 짐승이 된다. <사일런트 힐>은 대략 그런 식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시리즈 중에 2편이 유독 인상 깊었다는 사람이 많다. 물론 이야기와 게임 구조의 적절한 분배가 빼어나서겠지만 내가 다루고 싶은 내용이기도 하다.

<사일런트 힐> 시리즈의 2편은 죽은 아내의 편지를 받아 어느 장소로 향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반전이지만 반전 같지 않은 사실은 아내를 죽인 게 그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게임의 가장 마지막에 제시되지만 그 전에 이미 다 알게 된다. 클리셰라는 장르문법에 익숙한 게이머라면 쉬이 눈치챌 수 있도록 여러 힌트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일런트 힐>이라는 장소가 안개로 자욱한 무언가라는 점이 혼탁한 내면을 직시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었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게임의 공간 전부를 주인공의 내면으로 설정한 사실이 최초의 장르가 되었다. 여기서 첨언하자면, 나는 이러한 장르가 이전까지의 매체를 다시 쓰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안식처라는 개념이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뜻한다면 영화나 게임은 안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안식처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가 러닝타임 안에 다루는 이야기는 전체 서사 중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 그러니까 가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걸 잘라놓은 것이다. 과일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이 따로 있듯 영화나 게임도 단순히 볼륨 안에서의 이야기만을 가정하지 않는다. 거시 세계를 설정한 후 미시 세계의 무엇을 조명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톨킨의 소설 중 가장 무난한 부분을 실사화했고, 반대로 말하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이 바로 그곳에 있다. 영화는 데드타임이라는 이유를 들어 날카로운 편집을 자행하지만, 역사의 대부분은 그렇게 잘려나간 부위에 있다는 점이 우리가 생각해볼 논제이다.

여기서 <반교>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대만의 1960년대 후반을 다루는 이 영화는 우리가 익숙히 아는 몇몇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궤를 같이 한다. 특히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과 <반교>는 동일 시기의 비슷한 또래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먼저 <반교>는 금서로 지정된 책을 읽는 지하독서부에 참가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반면에 <고령가>는 자구책을 찾아 헤매는 소년의 폭력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이때 결과는 비슷하다. 소년과 소녀는 죽음을 맞이하거나 그에 준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런데 <반교>는 학교라는 공간에 원죄를 집어넣고 <고령가>는 영화라는 공간에 원망을 비집는다. 그러니까 사실, 에드워드 양이 영화라는 매체가 자신의 안식처로 사용된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영화 속 소년의 안식처를 학교에 대응한다는 점이 굉장히 기묘한데, 그에 비하면 게임이라는 매체는 영화가 말하는 감독과 작품의 관계를 실현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영화보다 입체적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대만의 역사를 다루며 윤리적 판단을 유도할 뿐이라면 그것은 작품이 될 수 없다. 흥행을 위해 윤리와 도덕과 신념을 이용한다면 그것만큼 악질적인 행위가 없다. 어쩌면 게임을 두고 질병이라 칭하는 이들에게 대항할 용도로 손을 들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와중에, 그래서 나는 <반교>를 도울 친구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2013년에 출시된 <데빌 메이 크라이>의 외전 작품은 권터 안더스의 매체이론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이야기를 다룬다. (정식 명칭은 ‘Dmc 데빌 메이 크라이’지만 본문에서는 축약해 표기한다.) 악마가 오래도록 세상을 지배해왔다는 설정을 한 이 게임에서, 현대의 악마는 과거와는 달리 언론을 장악하고 식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숨어들었다. 언론은 겉으로 정상적이나 실상은 악마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선동한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료는 뇌를 멍청하게 만들어 그런 언론의 농간에 놀아나게 한다. 이 게임에서 악마들의 세상은 현실 세계의 배면에 겹쳐 있는데 작품이 진행되다 보면 언론이 보도되는 매체 안이 바로 그곳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게 된다.

권터 안더스는 우리 세계가 이미 티브이 안의 그곳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매체라는 이름의 매트릭스를 주장했다. 이때 우리는 권터 안더스의 시대가 티브이가 막 등장하던 시기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권터 안더스는 갑자기 등장한 티브이라는 매체가 우리의 거실 중앙을 차지한 것을 두고서 그가 세상을 지배하는 걸 두려워했다. 이는 티브이가 거리의 가게나 전광판에서 발견되던 시기에 극대화되었고, 스마트폰이 도래한 현대에는 티브이를 보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니 그 영향력 또한 줄어들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권터 안더스의 개념은 티브이가 아니라 티브이라는 외형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는 티브이의 외견을 하고 나타난 매트릭스라는 이름의 악마를 목격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다고 여길 때 그렇게 목격된 이미지가 바로 우리의 세계라고 그는 주장한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갖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고령가>에는 에드워드 양 본인이 이것을 두고 영화라 말하는 대목이 몇 개 있는데, 그동안 우리는 그것을 에드워드 양의 자의식으로 파악해왔다. 이를테면 영화의 도입부에 켜지는 빨간 전등은 바로 뒤의 영화 촬영 장면과 연계되어 해당 장면의 대사를 보조한다. 영화를 찍는 일은 무언가 사명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예쁜 여배우를 찾는 것처럼 비주얼에만 충실한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에드워드 양 본인이 이 영화에 하고 싶은 말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역사적 사명이나 의무를 진 채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단지 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의 사이에서 작용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권터 안더스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이미지라는 이름의 매트릭스’에 살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목격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의 세계이고, 그래서 에드워드 양이 영화 초반의 장면을 통해 말하고자 한 건 아마도 다음과 같다.

보았다는 사실이 존재를 증명한다. 권터 안더스는 우리가 이미지에 집어 삼켜졌고 그걸 모르기에 현혹된 상태라고 말하지만, 에드워드 양은 그걸 깨달은 순간에 비로소 인간은 환경에 삼켜진 존재임을 깨우친다고 말한다. 예컨대 우리 인간은 물속의 물고기라는 점을 알게 됨으로써 물이라는 환경으로부터의 지배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가 세계의 종속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자신이 어디까지나 가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삶은 여러 인과가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하나의 드라마이지만 우리는 그걸 모른다. 그렇지만 우연이 겹쳐 눈에 띌 정도로 독특하게 되면 비로소 깨우치게 된다. 우리가 보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거짓이라는 이름의 환영처럼 보이는 진실이라는 점을 말이다.

<데빌 메이 크라이>의 결론은 악마들의 왕을 무찌른 형제가 서로 대립하는 것인데, 형의 의견은 쓰러진 왕을 대신해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것이고, 동생의 의견은 자유를 찾은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이때 형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술을 해킹하는 것에 능하고 동생은 그냥 몸으로 부딪히는 걸 잘한다. 동생이 주인공인 작품이므로 게임의 재미를 위해선 몸으로 부딪히는 게 더 나을 수밖에 없지만, 기술을 두둔하는 형이 ‘인간은 나약하고 그래서 왕이 필요한 존재’라 말하는 대목은 어딘지 모르게 우리 시대의 매체를 떠오르게 한다. 세계에 내쳐진 우리가 세계에 종속된 나약한 존재라면,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이미지’의 거죽을 쓴 채 찾아온 왕은, 우리에게 필요한가?

다시금 <반교>로 돌아와 보자. 공간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기법이 <사일런트 힐>을 통해 장르로 정립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공간을 무엇으로 보느냐는 것인데 우리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공간으로 가정할 때, 우리 세계는 곧 우리의 내면세계가 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살아가면서도 내면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은 <데빌 메이 크라이>가 제시한 인간계와 악마계가 배면의 세상이라는 점이다. 이 게임에서 주인공은 수시로 인간계와 악마계를 넘나드는데 인간계의 지형지물은 곧 악마계의 지형지물이 되며 서로는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서로의 공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때 우리가 그것을 두고 서로를 지나쳐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라 칭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라는 공간과 인간의 내면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다.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물을 때, 우리는 양쪽이 서로 동일하게 존재하지만, 명백히 다르면서도 결국에는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니 말이다.

자 여기 두 개의 세상이 있다. 우리는 그곳을 자유로이 넘나들지만 인지는 못 한 상태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안이 개입한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영화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말이 동일하게 성립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과연 무슨 근거로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게 아니라 그 메커니즘이 ‘우리도’ 궁금하다. <사일런트 힐>의 안개가 주인공의 자욱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불투명한 미래를 은유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안개라는 이미지가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술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고, 그렇다면 영화라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기술이란 우리를 현혹하는 사악한 무언가가 아니라 내면과 외면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도록 해주는 악마적 도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악마를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기술이라는 이름의 악마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오로지 공간에 관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중에 우리의 내면이 있다는 점에서 불안이 가중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세상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반교>는 부서진 현실에서 떨어진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중간계의 형태로 보여주는 게임이고 그러나 역사는 아니다. 그것은 가슴 아픈 역사의 일부이지만 역사의 일부라는 점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없기도 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이 확률은 우리의 시각을 위해 준비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그곳에 구류되고 어쩌면 우리가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른다. 죽어버린 세상에서 살아있는 영화로 도피하는 우리에게 남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곳이 우리의 내면세계라는 게 아니다. 영화에서 정해진 것은 시분초에서의 쇼트와 시퀀스이지만 게임에서 정해진 것은 시퀀스의 여러 시행절차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정해진 순간을 매번 수행하는 반면에 게임은 당신이 겪어야 할 절차를 미리 설계해두었다. 이른바 수행과 설계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선 우리가 게임이 영화가 될 때 설계를 수행으로 바꾼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세상이 인간 주체를 설계하고 그래서 우리는 수행할 뿐이라는 숙명론자가 있을 테고, 또는 자신이 설계한 것이 곧 세상의 원리라고 여기면서 그걸 수행하도록 우리가 설계되었다고는 숙명론자가 있을 테다. <반교>는 그런 이들을 위해 준비된 무대이다.  

숲속의참치

영화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와 대화할 수 없습니다. 나쁜 영화 좋은 영화는 없고, 살아가는 영화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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