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한국의 근현대사는 지난 20세기를 거쳐 오며 엄청난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였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그 후유증, 이념의 선택, 파괴적인 전쟁 등으로 대표되는 격동과 파란은 그 시기의 문화를 제작 생산하는 담당층들로 하여금 심신의 절대적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심신의 안정은커녕 절박한 생존의 기로에서 허덕여야만 했던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친일에 관한 논란, 분단시대의 이른바 매몰에 관한 논의 등이 줄곧 문화인들의 평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 한국의 문화인들은 이민족 통치 시절에 발표한 작품과 삶에 대한 반민족적 행위의 평가, 전쟁시기의 개인적 대응방식 등등 문화인으로서의 삶의 가치 선택과 위상에 대한 매서운 문책과 비판이 뒤따랐습니다. 문학사에서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이러한 질책성 눈길을 줄곧 느끼게 됩니다.

대중연예인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년 전부터 우리는 줄곧 가요계에서의 친일행적 논란에 휩싸인 경우가 한 둘이 아닙니다. 가요작품이란 것은 항시 그 시대 대중들과 더불어 숨쉬고,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통치자들이 가요작품을 체제의 선전을 위한 나팔수로 교묘히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민지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던 이른바 군국가요란 것이 그러했고, 70년대 유신통치시절 후반기의 이른바 시국가요 제작의 강요가 그러한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요 작품의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대표적인 작곡가, 작사가, 가수들의 존재성은 항시 지배체제의 통치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수 백년설(白年雪)도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수년 전 여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명단 발표로 온 나라의 여론이 뒤숭숭하던 때에 나는 벗들과 더불어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의 백년설 선생 생가를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높은 습도에 등과 가슴은 땀으로 흥건했습니다. 백년설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어떤 표지판조차 없었고, 엊그제 내린 비로 좁은 골목은 질척거렸습니다. 대문 앞에 서서 바라보는 생가의 광경은 영광과 오욕, 좌절과 허무의식으로 일관되었던 가수 백년설의 삶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듯 쓸쓸하고 적막하였습니다.

아주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혀 인기척이 없었고, 오로지 한 쪽 모퉁이에 묶인 강아지 한 마리가 악을 써서 낯선 방문객의 발길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을 뿐. 지붕과 서까래의 틈으로는 비가 샌 흔적이 보였고,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은 건물은 거의 냉담과 거부 속에서 방치된 기색이 뚜렷했습니다.

그 누가 이 낡은 건물을 험한 시대에 남겨진 민족의 절창 '나그네 설움'과 '번지 없는 주막' 단 두 곡으로 한 시대를 감동적으로 풍미했던 가수 백년설의 생가라고 인정할 것인가? 거의 다 쓰러져 가는 백년설 생가의 마당을 서성이며 나의 가슴은 너무나 비감한 심정에 젖어 들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광경이 상처와 유린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처참한 얼굴이자 본모습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기어이 발끝에 눈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1915년 경북 성주읍 예산리에서 태어난 가수 백년설의 본명은 이갑룡(李甲龍)입니다. 부친 이형순(李灐淳) 선생과 모친 김차악(金且岳) 여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갑룡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백년설은 49세 때 이창민(李昌珉)으로 개명하게 됩니다. 성주농업보습학교(현재의 성주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한양부기학교를 다녔고, 이후 은행과 신문사 등에서 잠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년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목표, 즉 작가가 되려는 꿈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한 시골청년에게 너무나 벅차고 힘겨운 것이었던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자신이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던 가수로서의 재능이 꽃필 수 있는 계기가 다가왔으니 그것은 1930년대 태평레코드 문예부장 박영호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이 바로 그것입니다. 태평레코드사가 일본으로 레코드 취입차 떠나게 되었을 때 친구 박영호의 제의를 받고 객원으로 함께 일본을 향해 떠납니다. 태평 소속 전속가수들이 취입을 할 때 이갑룡의 가수적 재질을 진작 눈치 채고 있었던 박영호는 은근히 이갑룡에게 취입을 제의하게 됩니다. 거기에 스스럼없이 부응했었고, 첫 취입곡이 바로 '유랑극단'(박영호 작사, 전기현 작곡, 백년설 노래, 태평 8602)입니다.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은 이갑룡이 직접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쳤고, 3절 가사는 거의 혼자서 써넣다시피 손질했습니다. 가수로서의 예명도 백년설(白年雪)이라 스스로 지었습니다. 다정한 친구의 제의로 장난삼아 취입한 이 노래가 뜻밖에도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백년설은 단번에 인기가수 반열로 껑충 뛰어오르게 됩니다. 이 작품은 식민통치의 압제를 이기지 못하고 유랑민의 신세로 전락한 1930년대 당시 한국인의 처지와 슬픈 존재성을 상징적으로 잘 담아낸 명작입니다. 하지만 백년설의 가요계 데뷔시기는 1939년으로 군국주의 체제의 광기가 점차 극에 달하던 때였으니 가수 자신에게 활동의 분위기나 환경이 몹시 불리하고 나빴습니다.

한 많은 군악소리 우리들은 흐른다
쓸쓸한 가설극장 울고 새는 화톳불
낯 설은 타국 땅에 뻐꾹새도 울기 전
가리라 지향 없이 가리라 가리라

밤 깊은 무대 뒤에 분을 씻는 아가씨
제 팔잔 남을 주고 남의 팔잔 배우나
오늘은 카추샤요 내일 밤엔 춘향이
가리라 정처 없이 가리라 가리라

흐르는 거리마다 아가씨도 많건만
이 가슴 넘는 정을 바칠 곳이 없구나
차디 찬 타국 달을 마차 우에 실고서
가리라 향방 없이 가리라 가리라

-'유랑극단' 전문

이후로 가수 백년설은 태평레코드사의 간판급 가수로 자리를 잡고 잇따라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게 됩니다. 우선 떠오르는 백년설의 대표곡 목록을 손꼽아 보더라도 다음 작품들이 당장 떠오릅니다. 하나같이 슬픈 아름다움을 지닌 주옥같은 가요작품들이지요.

‘두견화 사랑’,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일자일루', ‘눈물의 수박등’, '대지의 항구', ‘만포선 길손’, ‘복지 만리’, '삼각산 손님', '고향 길 부모길,' '고향설', '어머님 사랑', ‘아주까리 수첩’,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두견화 사랑', '북방여로', '비오는 해관', '산 팔자 물 팔자', ‘마음의 고향’, '상사(相思)의 월야', '석유등 길손', '신라제 길손', ‘해인사 나그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에서 우리는 내 나라 내 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자 일본의 종살이로 전락해버렸던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처연한 내면풍경을 감지합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로 시작되는 '번지 없는 주막'도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적막한 처지와 상실감, 방황심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외유내강의 노래입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소속의 일본인 검열당국자와 경찰 관계자들도 ‘주막에 번지가 없다고 말한 속뜻이 과연 무엇인가’를 따지며 생트집을 잡았다고 합니다.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끼는 버들가지처럼 한없이 부드럽고 은은한 성음을 지녔지만 위기와 역경 앞에서 결코 지치지 않고 끈질긴 의지로 힘든 시간을 극복해내는 한국인의 삶을 백년설의 노래는 잘 반영해내고 있습니다. 봄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날, 이윽고 날은 저물어 처마 끝 양철물받이에 투닥투닥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를 들으며 다정한 친구와 더불어 한 잔 술 앞에 놓고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직하게 부르기 좋은 노래가 바로 '번지 없는 주막'이 아닌가 합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나리던 그 밤이 애절쿠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깨무는 입살에는 피가 터졌소
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
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
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 잊느냐

-'번지 없는 주막' 전문

위의 목록에 모두 담아내지 못했지만 백년설은 유난히 고향과 어머니를 다룬 노래들을 많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살려 가사 제작에 백년설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41년 백년설은 자신이 몸담아오던 태평레코드사를 떠나서 오케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겼습니다. 당대 최고의 가수의 전속을 이동시켜가는 이적(移籍)의 과정에서 태평레코드사와 오케레코드사는 각종 의견의 대립과 갈등으로 잠시 소란스러웠습니다.

해방이 되고, 전 국토는 또 다시 분단과 전쟁의 불안한 기류에 휘말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악극단이 성세를 이루던 시절이라 백년설 선생은 태평(太平)악극단, 악단 제일선(第一線), 무궁화악극단 등의 여러 공연단체 소속으로 전국을 옮겨 다니며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이 계속 이어지면 질수록 살길을 찾아 쫓기듯 휘몰려 다니는 극도의 피로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백년설의 마음속은 항시 좌절과 허무의식으로 휩싸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삶이며, 무엇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일까? 전쟁 직후 백년설 선생은 대구에서 목재소와 고아원을 경영해 보기도 했고, 친한 벗들과 더불어 레코드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어느 것에서도 마음의 충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레코드 회사는 바로 서라벌레코드사라는 이름의 회사입니다. 본격적 체제와 규모를 갖추지 못한 영세한 회사였습니다만 진주 출신의 작곡가 이재호, 마산 출신의 가수이자 작사가인 반야월이 그를 가까이에서 극진히 도와서 여러 장의 음반을 제작 발표했습니다. 그들 셋은 과거 태평레코드사의 전속으로 험한 시절의 영욕을 함께 겪은 가족이나 육친과도 같은 친구들입니다. 이 무렵 자신이 운영하던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여러 음반들을 발표했는데 백년설은 가요 곡의 작사도 여러 편 맡았습니다. 이때 작사가로서의 필명은 향노(鄕奴), 이향노(李鄕奴) 등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대구의 대표적 레코드사였던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 백년설 선생은 서울과 대구, 부산 등지에서 자주 무대공연에 올랐습니다. 이때 남인수와 백년설은 서로 은근한 라이벌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공연에서는 선배가 항상 먼저 출연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1918년 출생의 남인수는 1915년 출생의 백년설보다 나이로는 3년 연하였지만 가요계 데뷔는 1936년으로 백년설의 3년 선배임을 앞세워서 자신이 먼저 출연해야 한다고 늘상 우겼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감정이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무렵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극장 쇼가 열렸을 때 이 문제로 또다시 긴장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오리엔트레코드사 대표이자 작곡가였던 이병주 선생이 냉큼 나서서 이를 말끔히 정리했다고 합니다. 이병주 선생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증언에 의하면 “낮 공연에는 남인수가 먼저 출연하고, 밤 공연에서는 백년설이 먼저 출연하는 걸로 타협을 짓자”라고 제의해서 이후 모든 불만과 갈등이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1955년 백년설 선생은 40세의 나이에 아내 이한옥 여사를 병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슬하에는 아직도 어린 1남3녀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 자녀들은 나중에 외할머니 댁에서 성장했습니다. 첫 부인이 작고한지 두 해 뒤인 1957년 백년설 선생은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뮤지컬 배우 및 전속가수로 활동을 하던 심연옥과 재혼을 하게 되었고, 슬하에 1남1녀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딸 혜정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심연옥 여사는 서울의 법도를 갖춘 집안에서 성장하여 결코 주변의 유혹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꼿꼿하고 엄정한 성품의 처녀였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 작곡가 김해송이 운영하던 KPK악단에서 활동하다가 전쟁 직후 대구로 내려와 서라벌 레코드 전속으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년설 선생을 만난 이후 선생의 워낙 젠틀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에 감복이 되어 점차 인간적 신뢰를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서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라벌레코드의 주변 친구들이 두 사람의 결합을 위해 많은 협조와 노력을 했던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백년설 심연옥 부부는 서울로 환도한 이후 서울의 종로구 도염동에서 살았습니다. 1963년 여름, 백년설 선생은 30년 가수생활을 정리하는 은퇴공연을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선생의 노래를 아끼고 성품을 흠모하는 많은 동료 후배 대중연예인들이 출연료를 받지 아니하고 자발적으로 교체 참여하여 무대공연은 그야말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공연이 계속되던 여러 날 동안 매일 다른 출연진이 무대에 올라서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은퇴공연 포스터에는 인파로 가득한 서울시민회관 앞 전경을 보여주는 사진을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인파, 선풍! 장안의 화제는 시민회관으로
백년설은퇴공연 절찬상연 중!
팬이여 안녕!! 님이여 안녕!
흘러간 30년 세월 속에 노래만 남기고
무대와 가수생활을 작별하는
가요계의 대장성(大將星)
백년설의 최후의 앵콜!! 가요 로맨스
“세월 속에 노래만 남고”전3부 18경(景)
인기스타진 매일 교체 출연
가객을 보내는 이별정거장의
전 연예인의 대향연!!
주최 백년설 은퇴공연추진위원회
주관 사단법인 한국연예협회
후원 공보부 동아일보사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사단법인 한국연예단장협회
7월17일까지 작별 공연합니다.

하지만 공연추진위원회의 한 멤버였던 박 아무개가 돌연히 모든 수익금을 챙겨 해외로 도피하는 사건을 겪은 이후로 인간에 대한 뼈아픈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되었지요. 그 시기까지 백년설 선생은 가수로서의 무대 활동뿐만 아니라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 평화신문사 사업국장, 센츄리레코드사 문예부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영화제작자, 쇼 다이아몬드 대표, 연예협회 기획분과위원장, 한국연예단장협회 회장, 경향신문 일본지사장 등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어떤 공식적 직함도 맡지 않고 오로지 종교 활동에만 주력했습니다.

삶의 누적된 피로와 고통의식 속에서도 백년설 선생은 항상 밝고 부지런하며 꼿꼿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 무렵 아내 심연옥과 함께 어느 특정한 종교이념에 심취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활동을 통하여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고, 기도와 묵상의 시간에 철저했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노라면 그동안 최고의 인기가수로서 이룩했던 화려한 영광과 추억들, 지위와 인기까지도 종교적 실천과 근면성에 비하면 덧없는 물거품이라 여겼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적 이상주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지요. 동시에 과거의 영화로웠던 기억을 되새겨보노라니 지금보다도 현저히 가치가 떨어지고 거기에 큰 기대나 정신적 비중을 둘 필요가 전혀 없다는 관점에 도달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난 시절과의 결연한 단절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백년설 심연옥 부부는 1978년, 자녀들의 권유로 미국이민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특히 딸 혜정은 부모님이 미국에서 편안한 노후생활을 보내시기를 간곡히 권유했습니다. 마침내 고국을 떠나 미국 땅 현지에서 자리를 잡은 뒤로는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습니다. 현지 교민사회에서 운영하는 라디오에 출연하여 지난 시절의 굴곡 많았던 곡절을 떠올리고, 당시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회고하는 프로그램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살아온 시간의 고단함과 피로 및 좌절감은 기어이 병세의 악화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백년설 선생은 식도혈관 파열로 말미암은 과다출혈에다 과거 간염을 앓았던 후유증까지 겹쳐서 기어이 회복할 수 없게 되었지요. 가수 백년설 선생은 1980년 낯 설은 미국 땅 로스엔젤리스의 어느 병원 중환자실에서 굴곡 많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버지의 임종 머리맡을 지켰습니다.

여러 해 전 백년설 선생의 평전 ‘오늘도 걷는다마는(백년설 그의 삶 그의 노래)’(이상희, 선출판사, 2003)이 발간되어 잠시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으나 흘러간 옛 가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따뜻한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세월의 바람결에 너무 덧없이 잊어지고 말았습니다. 경북 성주에는 현재 지역 출신의 가수 백년설을 기리는 노래비가 세 군데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는 성밖숲 도로변에 세워진 ‘나그네 설움’ 노래비입니다. 두 번째 노래비는 백년설 선생의 모교 성주고등학교 교정에 건립된 ‘나그네 설움’ 노래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노래비는 성주 이씨 재실인 봉산제(鳳山齋) 입구 언덕에 세워진 ‘번지 없는 주막’ 노래비입니다. 이 노래비들과 관련해서도 낱낱이 말하기 힘든 여러 아픈 사연들이 숨어 있습니다. 참외 생산지로 유명한 성주 지역에서 백년설가요제가 열리기도 했었으나 일제말 백년설 선생의 활동에 대한 반감을 갖는 단체들의 격렬한 반대로 말미암아 다만 1회로 끝나고 지금까지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있네요.

백년설 선생은 평생 건강의 비결을 일 년 사계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냉수마찰을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도 수련에도 특별한 관심과 재능을 갖고 있어서 무려 5단 실력의 수준에 이를 정도로 유단자로서의 공인자격증까지 가졌다고 하네요.

이제 우리는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체제 후반기에 가수로 데뷔하여 몹시 불리하고도 불편한 시대적 강요를 받으며 가수활동을 펼쳐가야만 했던 백년설 선생의 처지와 아픔을 생각해 봅니다. 과도한 심적 부담 속에서 고달프게 한 세상을 살아갔던 한 가수의 존재성과 의미를 다시금 차분하고 냉철하게, 또 한편으로는 따뜻한 손길로 더듬고 의의를 새롭게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019년 11월, 백년설 심연옥 부부의 따님 이혜정 여사가 미국에서 일시 귀국했습니다. 이혜정 여사는 현재 미국 시애틀에서 공인회계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여러 자녀들 가운데서 가장 아버지를 쏙 빼어 닮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아버지의 윤곽과 흡사합니다. 이혜정 여사는 아버지의 고향 경북 성주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늘 가슴에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필자의 안내로 이 여사는 아버지의 출생지이자 소년시절의 성장지였던 성주 예산리의 집터를 방문했습니다. 오래된 골기왓집은 현재 사라지고 그 자리엔 낯선 원룸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주의 세 군데 노래비와 재실 등 성주 이씨 옛 터전들을 두루 돌아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성주 이씨 가문의 후손으로서 아버지의 고향 성주를 난생 처음 찾아온 것입니다. 그 특별한 감회가 어떠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특히 아버지의 모교인 성주고등학교(옛 성주농잠학교)의 교정에 세워진 아버지의 노래비와 흉상 앞에서는 아버지 흉상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감격에 북받쳐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KBS의 ‘가요무대’ 프로에 출연하여 어머니 심연옥 여사의 대표곡 ‘한강’을 열창하기도 했습니다. 심연옥 여사는 현재 미국에서 아흔이 훨씬 넘은 나이로 비교적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다고 하네요. 백년설 선생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너무도 사랑하는 자녀의 가슴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이 남기신 불후(不朽)의 명곡 ‘나그네 설움’과 ‘번지 없는 주막’을 참으로 좋아하는 가요팬들의 뜨거운 아낌과 애호 속에서 여전히 우리 앞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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