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사진작가의 14,400km의 여정] 첫 유라시아 ‘우리 꽃’ 기행(下)

참기생꽃·달구지풀 등 대표적 북방계 식물을 만나다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호는 둘레에 무더기로 핀 분홍바늘꽃을 선사하며 이방인을 반겼다. 열차가 바이칼에 다가섰다 멀어졌다 반복하는 사이 동은 트고, 새벽 햇살을 받은 분홍바늘꽃은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출렁인다.

바이칼에서 발원하는 유일한 강인 안가라강 상류에 위치한 ‘건축-인류학 박물관 탈치’ 탐방의 날. 전세버스가 우리나라 민속촌과 흡사한 분위기의 박물관에 도착했다. 목조건물 사이사이로 안가라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너른 풀밭 곳곳에 러시아어로 ‘이반차이’라 부르는 분홍바늘꽃이 피었다. 원정대가 탈치를 둘러보는 사이, 짙푸른 안가라강을 배경으로 분홍바늘꽃을 카메라에 담는다. 꽃도 담고, 바다처럼 큰 강도 담고, 푸른 하늘도 담고···.

분홍바늘꽃 옆에 보라색 둥근 꽃이 무더기로 피었기에 다가서 보니 꽃쥐손이다. 평원에 수시로 나타났던 거대한 보라색 꽃밭의 한 주인이다. 그런데 국내의 꽃쥐손이보다 잎이 작고 가늘다. ‘꽃쥐손이류’라 부르는 게 맞겠다. 노란색 자잘한 꽃도 인사를 한다. 딱지꽃이다. 짙푸른 안가라강을 배경으로 핀 딱지꽃. 아마도 가장 멋진 그림의 딱지꽃이 아닐까.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한 안가라 강변에 핀 딱지꽃. Ⓒ김인철

흰자주꽃방망이는 ‘한반도 고유종’일까

국내에서도 흔히 만나는 자주꽃방망이는 탈치 박물관 숲에서도 보았고, 오후 자임카 숲에서는 꽤 여럿 만났다. 그런데 흰색의 자주꽃방망이를 만났을 때는 당황했다. ‘흰’자주꽃방망이라 불러야 하나, 그냥 ‘흰’꽃방망이로 불러야 하나 헷갈렸다. 자주색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꽃색을 빼고는 형태나 식생 등이 거의 같아 보였는데, 엄연히 국명도 다르고 학명도 달리 등록돼 있다. 게다가 흰자주꽃방망이는 ‘한반도 고유종’ 책에 올라 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에만 서식하는 종’이라는 뜻인데, 안가라 강변에서 만났다는 것은 흰자주꽃망방이가 한반도 고유종이 아님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가 아닐까.

남한에서도 흔히 자라는 자주꽃방망이. Ⓒ김인철
흰자주꽃방망이.Ⓒ김인철

분홍노루발·호노루발·새끼노루발 등 키 작은 희귀 식물의 보고

강기슭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자작나무와 적송이 제법 어우러진 숲이 나온다. 발아래 두터운 푸른 이끼 더미가 느껴진다. 키 작은 희귀종 풀꽃이 제법 있으리란 느낌이 강하게 온다.

맨 먼저 핑크빛 분홍노루발이 무더기로 인사를 한다. 남한에는 없고 백두산에 가야 만날 수 있는 북방계 우리 꽃이다. 꽃은 이미 시들고 열매를 맺고 있었지만, 한 송이만 피어도 숲이 환해진다는 진분홍의 색감을, 분홍색 꽃줄기와 열매만으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옛날 빙하기에 시베리아 벌판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남하했겠지만 이제 남한에선 사라졌다.

바로 곁에서, 잎이 유난히 작은 새끼노루발, 잎이 작고 둥그런 호노루발이 역시 남한에는 없는 북방계 식물이라고 외친다. 새끼노루발과 호노루발은 함경도와 평북 고산 지역 침엽수림에서도 자생한다는데, 직접 확인해 볼 날이 올까.

분홍 색감이 인상적인 분홍노루발. Ⓒ김인철
새끼노루발. Ⓒ김인철
호노루발.Ⓒ김인철

참기생꽃·노랑투구꽃도 한 이불 속에 피고

이끼 숲에선 또 설악산과 태백산 등 높은 산에 올라야 겨우 몇 개체 만날 수 있는 참기생꽃이, 이미 꽃은 졌지만 동그란 열매를 달고 선 채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그 곁에 남한에는 없는 씨범꼬리가 한 송이는 꽃이 핀 채로, 또 다른 여러 개체는 다닥다닥 열매를 단 채 서 있다. 두루미꽃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태백산에서도 두루미꽃과 참기생꽃을 같은 장소에서 만날 수 있는데 시베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보았다’는 시구처럼, 갈 때 보지 못한 노랑투구꽃도 돌아오는 길 이끼 숲에서 만났다. 키가 매우 컸는데, 바삐 지나치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남한에서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노랑투구꽃. Ⓒ김인철

린네풀·두루미꽃·진범 등 전형적 북방계 식물 잇따라

탈치 박물관에서 버스로 10여 분 이동해 점심식사를 한다. 주변을 살피니 온통 숲이다.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숲으로 들어선다. 집결 시간까지 40여 분이 남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들어서자 낯설던 숲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낙엽 더미와 이끼 속에서 하나둘 꽃이 보인다.

린네풀. ‘식물 분류학의 아버지’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1707~78)의 이름이 학명에 들어 있는, 린네풀이 늦둥이 꽃을 달고 낯선 이를 반긴다. 북반구 고위도 지역의 특산 식물로, 남한에선 이미 사라졌고 백두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상록성 덩굴 소관목이다. 평북과 함북에도 자라는 ‘우리 꽃’이다. 이어 눈에 들어온 것은 앞서 탈치박물관 숲에서도 만났던 두루미꽃. 개체 수는 많았지만 모두 꽃은 지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한참 동안 찬찬히 살피니 운 좋게도 미처 시들지 않은 두루미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 곁에 뱀톱도 눈에 띈다.

북반구 고위도 지역의 특산 식물인 린네풀. Ⓒ김인철
참기생꽃. Ⓒ김인철
두루미꽃.Ⓒ김인철

한라산엔 제주달구지풀, 시베리아엔 달구지풀…

저녁식사 전 러시아식 사우나인 바냐로 몸을 달군 뒤 강으로 뛰어든다. 바이칼 호수는 잠깐 발만 담가도 얼어붙을 듯 차가웠는데, 안가라 강물은 수영도 할 만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자주색 꽃이 보인다. 처음엔 갈퀴나물인가, 조록싸리인가 하면서 지나쳤고, 두 번째는 키 큰 붉은토끼풀인가 하고 지나쳤다. 그러다 또 나타나자 정색하고 들여다본다.
‘이건 또 뭐지?’
일단 카메라에 담는다. 확인하니 갈퀴나물과 조록싸리, 붉은토끼풀과 마찬가지로 콩과 식물의 여러해살이풀인 달구지풀이다. 주로 북한 지역에서 자생하는 북방계 식물로, 최근 남한 강원도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달구지풀에 비해 크기가 작은 종이 제주 고지대 풀밭에 자생하는데, 제주달구지풀이라고 별도로 분류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인 달구지풀. Ⓒ김인철

강가에 핀 닻꽃

남한에서는 강원도 화악산과 제주도 한라산 등에만 서식하는 희귀종으로,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닻꽃도 전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느닷없이 만났다. 관광객들이 바냐 체험을 하러 오는 안가라 강변 자임카 숲속 오솔길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 있었다. 꽃 모양이 선박을 한 곳에 떠 있게 하거나 멈춰 세우기 위해 줄에 묶어 물 밑으로 내리는 쇠갈고리를 똑 닮아 그 이름을 얻은 꽃, 남한에선 8월 중순 이후에 피기 시작해 ‘정주(定住)의 계절’ 가을의 전령쯤으로 여겼는데, 시베리아에선 7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하니 개화 시기가 한 달쯤 빠른 셈이다.

바이칼호 인근 자임카 숲에서 만난 닻꽃. 남한에서는 강원도 화악산과 제주도에만 서식하는 희귀종이자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닻꽃이 북방계 식물의 본향답게 시베리아에서는 흔하게 눈에 띄었다. Ⓒ김인철

* 이번 탐사는 홀로 사진을 찍으며 비공식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식물명 등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필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는 것이 유라시아 북방계 식물 연구의 단초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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