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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잘 대접하기[도영인의 정화수]
도영인 | 승인 2019.11.22 10:02

[논객닷컴=도영인] 누구나 다 남에게서 좋은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보일 때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함을 느끼며 특별한 존재가 된 것처럼 우쭐해지기까지 한다. 젊은 청년이 사랑에 빠졌을 때 구애하는 여인에게 최상의 대우를 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한 최선의 전략이 된다.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을 잘 대우해 준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끝까지 좋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 후에 마음이 변하여 배우자를 끝까지 잘 대접해주지 못하여서 결혼관계가 깨진다기보다는 상대방을 대접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여 결혼생활에 금이 가게 될 확률이 높다. 인간관계는 마음이든 느낌이든 서로 주고받는데서 균형이 이루어져야 의미 있는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값어치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이 돈 잘 버는 남편을 선택하는 등, 자기에게 부족한 면을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해 보충하려는 욕구가 있다.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계산적으로 이루어진 상호보상적인 관계가 모두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패할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혼인관계가 아닌 일반적인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대접받거나 대접하는 경우에는 건강하지 못한 상황이 연출되기 쉽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해 줄 때 그 인간관계는 결국 정의롭지 못하거나 비정상적인 거래로 추락한다. 뇌물수수 또는 상대방의 비리를 눈감아주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회는 인간을 가치 있는 인간답게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는 부패한 사회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같은 투명하지 못한 생각이 결국 모든 것을 망치게 된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하고 이용가치가 있는 수단으로서 대우할 때, 건강한 사회의 주춧돌인 신뢰와 안정감이 쌓이지 못한다. 

Ⓒ픽사베이

상대방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 인정하는 진정성이 있는 인간관계가 흔하지 않은 것은 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제한성에서 기인한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욕구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인류역사에서 노예제도, 여성억압, 인종차별, 종교차별 등 수많은 비정한 사회제도가 창출되어 왔다. 현 시대에 이르러 다른 인간에 대한 정의롭지 못한 억압행위가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약자들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남한, 북한, 미국을 둘러싼 국제적 외교관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기 힘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측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몰리는 국가를 휘두르려는 행태는 여전하다. 

직업이나 경제적 위치 등에서 열악한 조건 속에 사는 사람들이 기본인권이나 생존권 면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은 장기적인 사회적 효과성을 위축시키고 사회 불안정을 야기한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은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는 경우에 벌어진다. 자신의 능력이나 타고난 성향을 스스로 낮추어 평가하고 자신의 잠재성을 스스로 묻어버리는 사람들은 미래에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진다. 자기가 가진 인간본연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일찍이 배우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꼭 사랑이 많은 부모님이나 친척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그 값어치를 알아보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존감이 낮은 성인으로 성장하는 위험이 줄어든다. 성장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그만큼 사회 전체가 상생적인 집단지성으로 진화하기 어렵게 된다. 경쟁을 통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폭력이든 불법행사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어떻게라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현재 한국사회처럼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올라가려는 욕구가 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불행으로 치닫는 사회이다. 

젊은 청장년층일 경우에 경쟁에서 뒤지고 취업과 결혼까지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자존감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억눌린 일상생활에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도, 누가 뭐래도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비전을 갖고 살 수 있을까? 그런 비결이 있다면 좀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한 희망의 열쇠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어떤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 상황이 정의롭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나 세력으로부터 운명의 채찍질처럼 진행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내 영혼의 자유로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평화적인 시위, 시민공동체운동, 집단행동 등 사회적 제반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활동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이외에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개인적으로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제대로 대우하는 비결은 인간내면에 있다는 사실이다. 외부상황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신체적 고문이 행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내게 주어진 외부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이 아니다.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경우에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정당하지 못한 사회적 조건들이 개선되기까지는 제도적인 부당함을 이겨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타고난 본래의 값어치를 재확인하는 일이다.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최악의 상황에서 자살이나 테러행위로 마감하는 삶에 대해 나약하고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오죽하면 그랬을까하고 충분히 이해할만한,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한 처지로 몰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의 값어치를 끝까지 수호해 낼 힘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 그 힘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비상시에 자신의 본래가치를 지켜내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몫으로서 각자 책임질 일이다. 

요즘 TV를 보면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고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가는 등 온통 먹자판을 벌리는 장면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물론 건강한 식재료와 맛있는 음식은 내가 나를 잘 대접하여 소중한 몸과 마음을 보살피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사람의 본질은 음식만으로 제대로 보전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나를 잘 대우하려면 우리의 무의식세계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스스로 가치 있는 인간으로 대접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행을 자초하는 무의식적인 생각의 패턴 속에 갇혀 있는가?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야, 너무 가진 것 없고 가난한데다가 못 생기까지 했으니까 나는 정말 형편없는 존재야 등등의 생각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일이다.

탁월한 聖人(성인)의 수준에 못 미치는 필자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기억에 준거하여 해석되고 결정지어 진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각자의 체험을 통해 기억창고 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힘에 의해서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진정한 나의 힘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불행한 기억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들은 영원한 숙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숙명 또는 카르마(karma)는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무의식세계 속에 축적된 기억의 패턴일 뿐이다. 오랜 기간 동안 쌓여온 기억들이 일상생활습관에 영향을 미치고 부정적인 사고패턴을 지속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챔으로써 우리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내면의 힘으로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결정들을 할 수 있다. 

너무 슬프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슬픈 상황을 만들어 낸 다른 사람이나 불리한 여건을 만들어 낸 어떤 사건을 탓하기 쉽다. 그러나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힘든 상황에 반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결국 누구나 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의식세계에 대해서는 본인밖에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열쇠를 쥐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거나 변화시킬 수는 없다. 적어도 외부적인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화될 때까지 그 상황에 대처하는 일은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감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의 그 마음을 짐작해보자면 몸이 십자가에 달린 상황에서 스스로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자신을 십자가형으로 몰고 간 사람들을 이해하고 의식세계 속에서 그들을 용서하는 마음의 자유를 확실하게 행사하셨다. 물론 필자와 같이 일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악인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훌륭한 성직자나 성인의 흉내를 내자는 엉뚱한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인이 처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식세계를 직시하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대응하는 잠재적인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글을 씀으로 해서 필자 자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세계와 무의식적인 힘이 항상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문명사회에서 인간은 교육을 통해 습득한 판단력으로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누구나 다 우리는 이미 의식 속에 들어와 있는 지식과 정보와 온갖 간접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누가 뭐래도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만큼은 자기가 제대로 주인행세를 하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기술 중에서 그런 막강한 자의식의 힘을 길러주는 교육은 아직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의식 속에 주입시키는 영성지능기술적인 교육이 결핍되면 행복한 삶을 살기 어렵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대단한 나라에서 자신의 의식세계를 들여다보는 교육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외적인 경쟁만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는 것은 큰 불행을 초래해왔다. 자기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영성적 기술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든 실패의 원인을 외부적인 요소로만 돌리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물질주의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내가 나를 제 값어치에 상응하게 잘 대접해준다는 것은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내려놓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참모습을 잘 대접하는 것은 태어날 때 주어진 영혼의 호수에 비춰진 본래의 맑고 고요한 모습을 되찾는 일이다. 또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맛볼 수 있는 내면의 평화를 온전하게 누리는 일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오로지 자기만이 다스릴 수 있는 의식세계의 완전한 주인으로서 내면의 평화를 맘껏 펼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도영인

한 영성코칭연구소장
영성과 보건복지학회 고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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