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연의 하의 답장]

[오피니언타임스=이하연] 나는 매일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늘 미안함을 느낀단 얘기다. “왜 그렇게 예민해?”라고 묻는다면, “난 예민함과 잘 맞는 것 같아.”라고 대답하겠다. 데리고 가야 할 동반자이므로. 

실수에 대한 과거의 내 대처법은 “도대체 왜 그랬어?”였다. 아주 민감하게 굴었다. 스스로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고는 어디 한 번 해봐 식의 투. 과거를 부정하고 비난해봤자 내 손해고 시간 낭비인데.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었던지 무리해서라도 실수를 복원했고, 안 될 일은 곧 죽어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수가 창피했다. 나중엔 두려워졌다. 

그래서 도망쳤다. 내가 넘어진 길은 피했고, 가봤는데 무리가 없었던 길만 찾아다녔다. 나이는 먹고 머리는 자라나는데 데이터는 쪼그라들었다. 점점 커지고 다양해지는 세상 속에서 난 겁쟁이가 되어갔다. 나를 이렇게 대하는데 남을 어떻게 대하겠는가. 타인의 실수 역시 용납하지 않았다. 내게 실수를 저지른 타인에게서 도망치는 일도 잦았다. 살고 있던 곳에서 떠나보기도 하고, 카카오톡을 탈퇴하기도 했다. 어느 날,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살려고 그런 건데요 뭘.”

Ⓒ픽사베이

아주 펑펑 울었다. 사람들 앞에서 울긴 처음이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맘때쯤부턴가 실수에게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실수가 벌어질 만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점점 실수 자체를 부정하지 않게 됐다. 길 그까짓 꺼 좀 잘못 들면 어때, 시간 좀 내서 돌아가지 뭐. 과제가 있는 걸 까먹었네, 내일이라도 해야겠다. 그러니까 실수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진 셈인 거다. 

이렇게 꽤 오랜 시간을 살다보니 타인의 실수에도 무감각해졌다. 물론 내게 지나치게 무례한 경우까지 수용한다는 건 아니다. 대화 속에서의 자연스러운 실수나 행동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무례함 정도는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난 표면적으론 아무 문제없이 지나쳤을지언정 속으로는 꽁-한 면이 있었다. 나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지인들 역시 완벽하지 못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다보니 불호가 거의 사라졌다.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것도 괜찮아져버린 느낌. 좀 과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도 괜찮다고 쓰다듬었고, 좋아하는 일을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버려도 예뻐했다. 점점 실수를 의식하지 못했다. 의식하지 못하니 사과에 좀 둔해졌고, 추진력이 떨어졌다. 

실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기억하고 싶다. 여기에서만큼은 실수에게 너그럽되 주의를 주고 싶다. 실수했지만 괜찮고, 다음엔 다르게 해보자는 식의. 가만 보면 실수도 꽤 괜찮은 놈이다. 반성할 기회와 도전할 용기를 줄 때가 종종 있으니까. 그래서 좀 다시 만나 뵙고 싶다고 글로나마 요청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실수에 한에서만. 타인의 실수엔 여전히 “그럴 수도 있지.”다.

이하연

얼토당토하면서 의미가 담긴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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