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처음에 강연 제안을 받았을 때는 좀 난감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제게는 청각장애인들에게 음악을 연주해달라는 것만큼이나 난제로 다가왔습니다. 제 무지와 편견 때문이었다는 건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여행 관련 강연은 대개 사진 중심으로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볼 수 없는 분들에게 사진 속 풍경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경기도의 한 점자도서관에서 온 강연 요청이었습니다.

일단 수락을 해놓고도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일반인들과 똑같이 하되 사진에 대한 설명만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강연이 제대로 될까?’하는 의구심은 남아있었습니다. 강연장에 도착하면서 제 예측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우선 청중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대개는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도서관 인근 주민과 시각장애인을 도와주는 봉사자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시력을 잃었거나 잃어가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로부터 ‘그냥 한 번 들어보자’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어보자’는 열의가 고스란히 전해져왔습니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제 긴장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강연을 많이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시작한 뒤 5분만 지나면 그날 강연의 성패를 알 수 있습니다. 청중의 반응을 보면 내 말이 얼마나 ‘먹히는지’ 바로 알 수 있으니까요. 드물기는 하지만 전혀 ‘안 먹히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땐 등에 땀이 흐르고 말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이 남은 인생보다 더 길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날은 모든 게 순조로웠습니다. 청중들은 하나 같이 제 말에 귀를 기울였고, 더 잘 들으려고 집중했습니다.

Ⓒ픽사베이

그날 제가 성공했다는 증거는 1시간 30분 정도의 강연이 끝난 뒤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강연 뒤에는 대개 질의답변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엔 설마 질문이 나올까 하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여기저기서 손을 드는데, 조금 과장해서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온갖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결국 30분이 훨씬 넘도록 진솔한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저로서는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강연에서도 없던 일이었으니까요.

저는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여행에 대한 동경이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니, 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것 같았습니다. 조건과 환경에 무릎 꿇지 않는 열망이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심한 편견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확인하고 또 반성했습니다.

그런 짐작은 한 주 뒤에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강연 다음 주에는 ‘작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었습니다. 사실 그 프로그램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함께 가서 해줄 만한 게 별로 없었으니까요. 목적지가 충남 아산의 외암민속마을이었는데, 그곳에는 관광해설사가 기다리고 있고요. 도서관 측에 그런 점을 상의했는데, 시각장애인들은 작가가 함께 간다는 것 자체로 만족한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외암민속마을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곳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외암민속마을에 도착하면서 소풍은 활기를 띠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좋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와 함께 걷던 도서관 직원이 “이분들은 밖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해 해요”라는 말로 그런 분위기의 배경을 설명해줬습니다. 밖에 나오는 것으로도 행복한 이들에게 여행은 얼마나 즐거울까요. 그들과 함께 걸으며 저 스스로가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동행이자 관찰자가 되어 내내 그들의 여행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들은 피동적인 여행이 아닌, 능동적인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질문하고, 설명을 해주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질문했습니다. 궁금한 게 많다는 것은 관심이 많다는 뜻이지요.

그 마을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도 누구도 주뼛거리지 않았습니다. 동행한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밝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도서관 관계자들도 세심한 동작과 밝은 목소리로 시각장애인들을 돌봤습니다. 불편한 점은 없는지, 음식은 입에 맞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물었습니다. 한 시각장애인은 제게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자신도 글을 쓴다면서 제 작업에 관심을 보이고 자주 질문을 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의 소풍은 그렇게 즐거움 속에서 끝났습니다. 작은 행복을 키워 큰 행복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들 속에서 저는 끝내 이방인이었습니다. 어디까지 틈입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뭔가 전해줘야 하는 역할을 잃어버리고 내내 배우기만 했습니다. 반성도 함께 한 여행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짐했습니다. ‘절대 선입관을 사람 재는 잣대로 삼지 말자.’ 소풍 길을 함께 한 시각장애인들이야말로 진짜 스승이었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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