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32]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누구나 알다시피, ‘천자문(千字文)’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된다. 아이들은 천자문을 배울 때 맨 먼저 ‘하늘 천, 따 지…’를 읊었다. 그러면서 ‘하늘의 도’인 천도(天道)를 익혔다.

천도 다음에는 지도(地道)다. ‘땅의 도’다. 천자문의 지도에는 ‘금생여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는 문장이 가장 먼저 나온다. 금은 여수에서, 옥은 곤륜산 언덕에서 생산된다는 뜻이다.

중국 사람들은 땅에서 나오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게 금, 가장 좋은 것을 옥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금 생산지인 여수와, 옥 산출지인 곤륜산을 천자문의 앞부분에 넣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하늘은 까맣지 않고 청명하다. 땅의 색깔도 노랗지 않고 푸른색이다. 금과 옥은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천지현황…’ 운운하면서 중국의 지리만 배웠다.

천자문은 지리뿐 아니라 역사, 인물까지 모조리 중국 것이다. 아이들은 그 천자문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달달 외웠다. 심지어는 끝에서 위로 거꾸로 올라가며 암기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천자문을 떼고 나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익혔다. 동몽선습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고 가르쳤다.

Ⓒ픽사베이

‘미녀’에 관한 이야기도 다르지 않았다. 천자문에는 ‘모시숙자 공빈연소(毛施淑姿 工嚬姸笑)’라는 문장도 나온다.

‘모’는 월나라 임금 구천의 애첩 ‘모장’이다. ‘시’는 그 구천이 오나라에게 패한 뒤 오나라 임금 부차에게 미인계로 바친 ‘서시’다. 얼마나 미인이었던지 찡그리는 모습도, 웃는 얼굴도 ‘짱’이었다는 미녀다.

중국의 미녀는 많았다. 당나라 현종이 애지중지했던 양귀비는 ‘해어화(解語花)’라고 했다. ‘말하는 꽃’라는 뜻이다. 한나라 무제 때 이연년의 누이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다. 나라를 기우뚱거리게 할 만큼 놀라운 미녀였다.

물론 지나치게 밝히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장자가 말했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미인이다. 하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沈魚),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날고(高飛), 사슴은 그들을 보면 도망칠 것이다.”

모장은 천자문에 나오는 그 ‘모장’이고, ‘여희’ 진나라 임금 헌공이 아끼던 절색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만 천하절색이지 물고기나 새, 사슴에게는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자기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무서운 존재일 뿐인 것이다.

미색에 빠져들지 말라는 교훈이지만, 그 가르침마저 중국 미녀만 언급하고 있었다. 우리 미인은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 미녀는 중국을 뛰어넘기도 했다. 조선 때 중국 사신이 왔을 때였다. 중국 사신의 행렬은 항상 구경거리였다.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미인 많다는 나라에서 온 사신이 구경꾼 중에서 계집아이 하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 나라에 천하 으뜸 미인이 있구나!”

계집아이는 그 많은 구경꾼 가운데에서 ‘군계일학’이었다. 훗날 송도 기생으로 성장하는 황진이가 그 계집아이였다. 그런데도 중국 미녀만 미녀였다.

단재 신채호가 훗날 ‘사대주의 병균’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한 신라의 당나라 제도 도입은 제도에 그치지 않았다. 교육제도까지 그대로 들여왔다.

‘이른바’ 통일신라 때의 삼사(三史)라는 역사 교과서는 사기, 한서, 동관기 등 모두 중국의 역사책이었다. 당나라가 ‘과거시험’의 과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배운 게 남의 나라 역사였다.

그 바람에 ‘제갈량’은 알아도 ‘을지문덕’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모른 채 자라야 했다. 조선시대까지 계속 그랬다.

장차 임금이 될 수 있는 ‘왕자’나 ‘원자’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태어나기 전부터 ‘사대주의 태교’를 받았다. 왕비는 왕자나 원자를 잉태하는 즉시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과 같은 훌륭한 아들이 태어날 것을 기대하며 태교에 들어간 것이다.

태어나서는 다섯 살 정도가 되면 교육을 받았다. ‘소학’, ‘천자문’, ‘격몽요결’ 등을 달달 외워야 했다. 아침, 낮, 저녁으로 하루 세 차례 익혀야 했다.

그랬으니 ‘예비 임금’은 저절로 ‘중국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임금이 되면 중국의 황제처럼 나라를 다스릴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승도 다르지 않았다. 중국 것만 배웠으니, 스승이 되고 나서도 중국 것만 교육했다. 고려 말 공양왕 때 조준(趙浚)은 이렇게 개탄하기도 했다.

“…유학자라는 이름을 걸고 군역(軍役)을 피하려는 위선자들이 시골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당나라, 송나라 문장이나 가르치면서 이것을 여름에 하는 공부라고 한다.…”

소위 ‘선비’들은 이랬다. 여성들도 그런 선비들을 ‘부창부수(夫唱婦隨)’로 따라야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여성은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를 꼽았다. 태임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사는 무왕(武王)의 어머니였다. 우리에게도 훌륭한 어머니가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중국 어머니’를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태임’을 아예 이름으로 삼은 사례도 있었다. ‘사임당(師任堂) 신씨’다. ‘사임당’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태임처럼 훌륭한 어머니가 되겠다는 희망이었다.

신사임당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상임에 틀림없다. 현모양처상임에도 틀림없다. 사임당이라는 이름도 당시로서는 자랑스럽고 자연스러운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 신사임당을 우리는 5만 원짜리 돈을 볼 때마다 만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5만 원짜리 돈의 도안을 ‘광개토대왕’으로 하자는 누리꾼의 요구가 적지 않았었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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