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의 고도를 기다리며]

[오피니언타임스=김봉성] 이런 허무감에 휩싸일 줄은 몰랐다. 통장이 예상보다 빠르게 뚱뚱해지던 어느 날, 논술을 가르치던 학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왜 꿈이 있어야 하나요. 필요한 건 돈 아닌가요?”

요즘 중·고등학생들의 꿈은 건물주라고 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지만, 주변에서 들은 솔직한 이야기다. 통계에 잡히는 수준에서는 유튜버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신이 꿈이 없는 것을 죄책감처럼 받아들이던 학생들이 최근에는 ‘돈만 있으면 꿈은 필요없다’고 반문한다.

학생들의 당돌한 발언에 나는 어쭙잖은 실존철학을 가져와 기투(企投)하는 인간을 설명했다.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사실 꿈을 쫓아서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꿈은 높은 확률로 인생을 배신한다. 어쭙잖은 재능도 안 되고, 노력도 안 되고 좌절하기 십상이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높이 오르다 떨어져 불구가 된 갈매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인류는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투쟁해 왔으므로 건물주나 유튜버는 인류 노동사의 솔직한 목표인 셈이다.

꿈은 기댓값이 지나치게 낮다. 고등학생을 열일곱에 시작해 꿈에 목을 맨 사람이 100명이라고 치면 꿈을 이룬 사람이 한 명은 될까? 잘난 놈 젖히고, 못난 놈 밟고, 욕구들 다 죽이고 공부에 매달려 봐야 꿈은 사라져버리기 일쑤다. 결국 우리는 현실에 맞춰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직업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그럴 바엔 애초에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는 게 나았다. 소비를 통한 무한한 쾌락이 가능한 세상이다. 공리주의자 밀(Mill)도 넷플렉스와 스타벅스를 본다면, 배부른 돼지가 누리는 쾌락의 양을 폄하하긴 힘들 것이다.

꿈을 직업과 일치시키는 것은 꿈의 의미를 협소하게 이해한 것이다. 물론 ‘고작 직업’을 얻으려는 분투로 밥벌이는 ‘무려 직업’으로 격상되었다. 그래서 직업이 꿈의 위상을 갖는다고 해도 반대하긴 힘들다. 그러나 이루고 싶은 꿈이 직업이라면, 직업을 이룬 다음에는 꿈은 사라진다. 직업을 가진 후 더 이상 ‘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았다는 깔깔한 절망감에 마음을 쓸리지 않았던가? 밥벌이 압박 때문에 곧 무감각해졌겠지만.

‘되다’의 세뇌는 강력했다. 어렸을 때부터 장래 희망이라는 이름의 미래 직업을 강요받은 탓에 ‘어른이 되면 모모가 될 테야!’가 곧 자아실현으로 이해되었다. 꿈이 자아실현이라는 말도 의외로 허무맹랑한 의미를 내포한다. 내 자아는 여기 있는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를 맹신하는 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현실자아는 이상자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매순간을 살아야 하는 현실자아는 늘 미완이어서, 이상자아와 간극만큼의 열패감이 현실자아의 몸통이 되고 만다.

꿈은 ‘가치’에서 시작된다. 인류 공영, 지구 평화, 아니면 우주 정복이라도. 가치는 지속되어야 하므로 내가 무엇이 되어,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다. 직업이 가치를 실천하는 수단으로 선택되어야 자아실현을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이다. 직업은 쉽게 이야기하는데, 가치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학교와 가정의 현실이다. ‘나는 지구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는 중2병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학교에서조차 가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등학생의 꿈은 내신과 수능 등급에 따라 규격화 되었다. 가치의 자리를 돈에 내주며 꿈은 상품이 되었다. 그래서 건물주가 되어 무한 소비를 꿈꾼다. 건물주가 될 수 없는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결핍감 가득한 재고가 되어간다.

그렇다고 가치만이 꿈의 본질은 아니었다. 이렇게 살기 싫다고 푸념해버린 나는 내 나름의 가치를 실천 중이었다. 공부해서 남 주는 삶을 살고 있다. 치열하게 줬고, 받는 이가 납득 가능하게 줬다. 적성에도 맞았다. 그러나 일할수록 화이트아웃처럼 마음의 시야가 흐려졌다. 내가 뭐 하는 것인지,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경직된 고독감의 이유는 이렇게 살기 싫다고 말한 지 두세 주가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어머니께 자주 전화 드렸다. 뭐 필요한 것 없느냐고 여쭈었다. 필요 없다고 하시든 말든 화장품, 옷, 비타민을 보내드렸다. 결제를 마치고 나면, 하느님이 지구를 만들고 나서 담배 한 대 피울 때 느꼈을 법한 뿌듯함이 벅차올랐다. 그 느낌은 빈 것이 채워지는 것이므로 일종의 ‘실현’이었다. 그 또한 자아실현 아니었을까? 내 가치로 직진하는 와중에는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어 나는 가시나무처럼 쓸쓸했던 것이다. 우리는 자아실현을 지나치게 독립적 자아관으로 이해해왔다.

관계적 자아관이 필요할 때다. 배부른 돼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다. 건물주는 세입자가 필요하고, 유튜버는 구독자가 필요하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삶은 직선이 아니다. 나의 삶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 면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면은 꽃무늬 원단이 되고, 나는 원단으로 무언가를 만든다. 자아실현이란 결국 내 몸에 맞는 꽃무늬 옷을 입는 일이 아닐까?

요즘은 유명인이나 부자보다는 주변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다. 매순간 온전한 자아일 테니까. 그러나 학교도, 사회도,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만 추앙했고, 그 속에서 많은 갈매기들이 좌절했다. 이제는 좌절하기도 지겹다. 그래서 나는 청년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꿈을 정했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 꽤, 진지하다.

 김봉성

대충 살지만 글은 성실히 쓰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opiniontimes.co.kr)도 보장합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