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명주군왕의 추봉과 신라 하대의 시대상

[논객칼럼=김희태] 일반적으로 능(陵)이라고 하면 왕과 왕비, 대비의 무덤을 이야기하는데, 보통의 경우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신라의 경우 경주, 고려는 개성, 조선의 경우 서울과 경기도 등에 왕릉을 집중적으로 조성했다.

그런데 강릉에도 왕릉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 강릉에 무슨 왕릉이 있냐는 금시초문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실제 강릉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 강원도 기념물 제12호)이 남아 있다.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명주군왕릉의 단어를 끊어서 읽어보면 의외로 해당 왕릉의 정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자리한 명주군왕릉 Ⓒ김희태
명주군왕릉의 묘비, 묘비의 전면에 ‘명주군왕김주원지묘(冥州郡王金周元之墓)’가 새겨져 있다. Ⓒ김희태
보덕국의 치소로 여겨지는 익산토성, 신라의 경우 외왕내제의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우선 명주(溟州)는 신라 때 9주 중 하나로,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강릉과는 별개의 지역으로 존속했던 곳이다. 즉 명주군왕은 실체가 있는 나라의 성격이 아닌 명목상의 봉작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데, 가까운 예로 대한제국 때의 영친왕과 의친왕처럼 친왕제도 혹은 제후의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의외로 신라는 겉으로는 왕을 칭했지만, 내부에서는 제후국을 거느린 일종의 외왕내제(外王內帝)의 성격을 지닌 국가였는데, 이는 명주군왕이나 보덕국왕을 책봉한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명주군왕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으며, 어떤 시대상을 담고 있을까? 

■ 신라 하대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한 장면이 되는 명주군왕

명주군왕의 책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 하대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명주군왕의 봉작은 애초부터 있던 것이 아닌, 한 사건을 통해 파생되었다. 해당 사건을 요약해보면 785년 신라의 왕이던 선덕왕(재위 780~785)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선덕왕은 구족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했기에, 자연스럽게 신라 내부에서는 새로운 왕으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지를 두고 논의가 진행되었다. 당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던 인물로는 크게 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과 상대등인 김경신으로 압축된 상황이었다.

경주 북천, 과거 알천으로 불린 곳이다. 기록을 해석하자면 이곳의 홍수로 물이 불어나 김주원의 입궁이 지체되었다. Ⓒ김희태
알천제방수개기(閼川堤防修改記), 1707년 알천의 제방을 정비한 기록이다. Ⓒ김희태

어떻게 보면 혜공왕 시기 김양상(=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반란을 수습하고, 선덕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김경신이 유리해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예상과 달리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 인물은 김주원이었다. 당시 김주원의 집은 서라벌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입궁을 위해 서라벌로 출발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홍수로 불어난 물로 인해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입궁 시간이 지체되자 김경신은 이를 하늘이 내린 기회로 여기고, 주변을 부추기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여론을 이끌어간 결과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가 바로 원성왕(재위 785~798)이다.

경주 원성왕릉, 홍수로 인해 입궁이 지체되자 상대등 김경신은 이를 하늘의 뜻이라는 구실로, 주변을 부추겨 왕위에 올랐는데, 바로 원성왕이다. Ⓒ김희태
강릉 명주군왕릉, 원성왕은 왕위에 오른 뒤 김주원에게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명주군왕으로 봉했다. Ⓒ김희태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왕으로 추대되었던 김주원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이는 원성왕 역시 마찬지였는데, 보통의 경우 어느 한쪽의 힘이 압도적이라면 후환을 대비해 상대방을 제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원성왕은 김주원에게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명주군왕에 봉하는 일종의 유화책을 제시했다. 이는 양 세력 모두 어느 한쪽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기 어려웠다는 반증이자 서로의 견제 속에 이같은 타협안이 도출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성왕의 제안을 김주원이 받아들여 명주로 건너가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김헌창의 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김헌창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822)은 신라 정계에 두각을 드러낸 인물로, 한때 시중으로 임명되는 등 헌덕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나름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왕실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바로 애장왕(재위 800~809)을 살해하고, 숙부인 헌덕왕(재위 809~826)이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이러한 권력의 교체가 있은 뒤 승승장구 했던 김헌창은 권력에서 배제된 채 지방의 한직을 전전하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김헌창의 난(822)이었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웅천주, 지금의 공산성이다. Ⓒ김희태

<삼국사기>를 보면 김헌창의 난의 공식 명분이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적고 있다. 이러한 공식 명분 이외에 권력의 배제와 상실 역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된 김헌창의 난은 이후 큰 파급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선 반란의 시작인 웅천주를 시작으로 무진주와 사벌주, 완산주, 청주 등 5개의 주가 반란에 동참했다. 즉 신라 9주 가운데 5주와 5소경 가운데 국원경(國原京, 현 충북 충주), 서원경(西原京, 현 충북 청주), 금관경(金官京, 현 경남 김해) 3곳이 김헌창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김헌창은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 연호는 경운(慶雲)인 새로운 국가 수립을 꾀했다.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이곳의 유일한 함락이 바로 김헌창의 난과 관련이 있다. Ⓒ김희태

한편 여세를 몰아 반란군의 세력이 성산(현 경북 성주)으로 집결했는데, 신라로서는 김헌창의 난을 조속히 진압하지 못할 경우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신라는 신속한 반격을 개시했다. 우선 성주로 집결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중앙군을 파견했으며, 균정의 활약 속에 진압이 되었다. 또한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연합해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삼년산성(현 충북 보은)을 공략하며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의외의 신속한 반격에 허를 찔린 반란군은 내부에서부터 맥없이 무너지며 와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헌창은 본거지인 웅진성에서 항전하다가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결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김헌창의 난은 종결이 되었다.

 

경주 헌덕왕릉,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수양대군(=세조)의 위치와 묘하게 닮아 있다. Ⓒ김희태

하지만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여전히 후폭풍이 거셌다. 우선 반란의 주동자인 김헌창의 경우 성이 함락되기 전 자결한 뒤 머리와 몸을 베어 따로 묻었다고 하는데, 헌덕왕은 따로 묻은 김헌창의 시신을 찾아내 다시 시신을 훼손했다. 또한 김헌창에 동조했던 239명을 숙청하는 등 정국은 크게 요동을 쳤다. 또한 김헌창의 아들인 범문이 고달산의 도적 수신과 모의하여 반란을 획책하는 등 정국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어떻게 보면 김헌창의 난은 신라 왕실에 있어 무열왕계의 퇴보를 뚜렷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흥덕왕 사후 왕실의 혼란 양상과 명주군왕으로 추봉된 김양 

한편 흥덕왕 사후 신라 정국의 혼란 속에 또 한명의 명주군왕의 흔적이 나타나는데 바로 김양(808~857)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김양의 가계를 살펴보면 김주원의 또 다른 아들인 김종기(=명주군왕)-김정여(=명원공)-김양(명주군왕 혹은 명원군왕)으로 이어지는데, 이렇게 보면 김양은 김주원의 증손자인 셈이다. 김양이 살았던 시대는 신라 하대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흥덕왕(재위 826~836)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두고 내전 양상을 보이게 된다. 당시 내전의 주요 세력은 크게 제융(=희강왕)과 균정(?~836)으로, 김양은 균정의 아들인 우징(=신무왕)과 함께 균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내전의 결과 균정이 살해되며, 김양은 졸지에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게 신라 왕실은 표면적으로 제융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희강왕(=제융, 836~838)이다. 그런데 희강왕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상대등 김명의 핍박으로 희강왕이 스스로 자결을 선택하면서, 김명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민애왕(재위 838~839)이다.

경주 흥덕왕릉, 흥덕왕 사후 신라 왕실은 왕위를 두고 극심한 내분 양상을 보이게 된다. Ⓒ김희태
경주 희강왕릉, 균정과의 왕위 다툼에서 승리했지만, 불과 2년 뒤 상대등 김명의 핍박 속에 스스로 자결을 선택해야 했다. Ⓒ김희태
경주 傳민애왕릉, 왕위에 올랐지만 불과 1년 뒤 장보고의 개입 속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김희태

신라의 정국이 이처럼 변화되자 김양과 우징은 청해진 대사인 장보고(?~846)를 끌어들여 민애왕을 치게 했다. 이를 수락한 장보고의 개입으로 상황이 반전되어 결국 두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민애왕은 도망치다 월유의 집에서 사로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렇게 비어있는 왕위에 균정의 아들인 우징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신무왕(재위 839)이었다. 하지만 신무왕은 재위한 지 불과 1년도 못 되어 병사하고, 신무왕의 아들인 경응이 왕위에 올랐는데, 바로 문성왕(재위 839~857)이다. 흥덕왕 사후 희강왕의 즉위부터 문성왕의 즉위까지 불과 4년의 짧은 기간 동안 4명의 왕이 교체되는 양상은 정국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김양은 이러한 정국의 변화에서 신무왕과 문성왕의 즉위에 크게 기여를 했고, 특히 문성왕 시기에는 장보고의 제거와 청해진의 해체에 직,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등 그 영향력이 작지 않았다.

완도 청해진, 신라 왕실의 혼란 속에 뜻밖의 인물인 장보고가 개입하게 된다. Ⓒ김희태
경주 신무왕릉, 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불과 1년도 못되어 병사하게 된다. Ⓒ김희태
경주 무열왕릉에 배장된 김양의 묘, 훗날 김양은 명주군왕으로 추봉된다. Ⓒ김희태

당시 김양의 작위를 보면 소판(蘇判) 겸 창부령(倉部令)및 시중(侍中) 겸 병부령(兵部令)의 지위에 있었다. 이를 지금 기준으로 해석해보면 국무총리 겸 국방부, 기획재정부 장관의 권한을 동시에 행사할 만큼 막강한 실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양의 딸이 문성왕의 왕비가 되는 등 그 위세가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김양이 세상을 떠날 때 문성왕은 김양을 서발한(舒發韓)에 추증하고, 김유신의 예에 따라 무열왕릉에 배장 되었으며, 명주군왕(=명원군왕)으로 추봉되었다. 이처럼 명주군왕의 봉작과 명주군왕릉의 존재는 신라 하대의 시대상과 관련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지점으로, 나름의 의미를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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