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Dendranthema zawadskii var. yezoense (Maek.) Y.M.Lee & H.J.Choi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문정희의 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중에서

겨울이 깊어가면서 북풍한설에 으스스 몸을 떨면서도, 한바탕 눈이 쏟아졌으면 하는 객기 어린 바람을 가져봅니다. 올겨울 두어 차례 눈이 내렸다는 뉴스를 접하긴 했지만, 서울 인근에선 체감할 만한 양의 눈이 내린 걸 못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눈 없는 겨울’이란 ‘앙꼬 없는 찐빵’처럼 왠지 허전하고 2% 부족하다는 건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믿습니다. 뜻밖의 폭설을 만나 누군가와 함께 고립되고 싶다는 치기 어린 감상이 한껏 부풀어 오르던 지난 가을 어느 날, 저 멀리 남녘의 바닷가에서 그야말로 한겨울 눈처럼 하얗게 쌓인 꽃을 보았습니다. 수년 전 한창 번성했을 때에는 섬 전체를 하얗게 뒤덮기도 했다는 들꽃을 만났습니다. 이름하여 남구절초입니다.

저 먼 남녘 섬 거제도의 관광명소인 ‘바람의 언덕’에서 만난 남구절초. 11월 초순까지도 제법 무성하게 남아 있는 남구절초 꽃밭이 한겨울 하얗게 쌓인 눈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김인철
Ⓒ김인철

즉 우리나라 남쪽 지역, 그중에서도 남해의 섬과 바닷가에서 자생한다고 해서 별도로 분류된 남구절초입니다. 남구절초는 특히 제주도 인근의 추자도는 물론, 남해 거제도의 관광 명소인 ‘바람의 언덕’, 그리고 빼어난 해안 풍광을 자랑하는 소매물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 내 크고 작은 섬들의 가을 야생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남구절초가 만개하는 시기는 겨울이 본격화된 12월 이후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서울·경기·강원 등 중부 지역에서 자라는 구절초나, 한탄강과 영월·정선에서 자라는 포천구절초, 그리고 지리산 등 고산의 산구절초 등처럼 8~9월 일찌감치 피고 지는 것도 아닙니다. 9월부터 피지만 다른 구절초들이 이미 다 지고 난 뒤인 11월까지도 싱싱하고 풍성하게 꽃송이를 유지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꽃도 클뿐더러, 둥근 잎은 넓은잎구절초를 닮았으되 두껍고 표면에 윤택이 있는 등의 차이를 보입니다.

짙푸른 다도해를 바라보며 핀 남구절초. 남녘 바다와 등대, 그리고 섬들이 구절초 앞에 ‘남(南)’ 자가 붙은 이유를 말해주는 듯하다. Ⓒ김인철
Ⓒ김인철

바닷바람 탓인지 다른 구절초에 비해 비교적 작은 편인, 높이 20~50cm 정도로 자랍니다. 가을이면 원줄기 끝과 가지 친 줄기 끝에 1개씩, 하나의 포기마다 5~6개 정도의 머리모양꽃차례가 하늘을 보고 달립니다. 꽃차례마다 중앙에 노란색 대롱꽃이 자리 잡고, 그 주위에 길이 2cm, 폭 5mm 정도의 혀꽃이 빙 둘러 납니다.

흙보다는 갯바위가 더 많고, 억새나 사초 등이 무성하게 자라는 척박한 바닷가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뽐내며 피어나는 남구절초. 억척스러울 뿐 아니라 왕성하기도 한 생명력 덕분인지, 한두 송이 겨우 피는 게 아니라 수십, 수백 송이가 떼로 뭉쳐납니다. 흰색의 꽃송이들이 거칠 것 없는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반짝반짝 빛날 때면 한겨울 하얗게 쌓인 눈밭을 보는 듯합니다.

남쪽 섬과 해안에서 자라는 남구절초. 줄기 잎은 주걱 모양인 데 반해, 뿌리 잎은 넓은 계란형에 두껍고 표면에 윤택이 있으며 잎의 끝부분이 얕게 갈라진다고 도감은 설명한다. Ⓒ김인철

쑥부쟁이, 개미취, 산국 등과 함께 들국화란 통칭으로 불리던 구절초. 그런데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식한 놈’을 질타하는 시가 나오자, 이 둘의 판별을 넘어 30여 종의 구절초를 분별해보겠다는 이들까지 하나둘 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서흥구절초니 낙동구절초, 넓은잎구절초 등이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사라졌습니다. 남구절초에는 ‘비합법명’이란 낙인이 붙었습니다. 구절초 외에 이화구절초, 바위구절초, 울릉국화, 포천구절초, 한라구절초, 신창구절초, 산구절초 등 7개만 살아남았습니다. 토양의 산도나 햇볕의 양 등 환경에 따라 잎과 꽃, 키 등 형태의 변이가 많은 데다, 쉽게 자연교잡이 이뤄지는 구절초류의 특성을 고려할 때, 전문가들도 식별하기 어려운 차이를 이유로 세분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결정으로 이해됩니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의 명물인 풍차, 그리고 바다 산책로를 배경으로 핀 남구절초. 흰색과 분홍색 꽃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색감을 선사한다. Ⓒ김인철
Ⓒ김인철

정호승 시인은 말합니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여기에 하나를 더해봅니다. 파란 하늘과 짙푸른 바다, 그리고 눈처럼 흰 남구절초를 보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한겨울 한계령 눈밭에 갇히듯, 겨울의 문턱에서 못 잊을 사람하고 저 멀리 다도해 남구절초 하얀 꽃밭에 갇힌다면….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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