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코리아 프리미엄 프로젝트]

[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세계인구시계에 의하면 2019년 12월 14일 기준 지구상 인구는 총 77.5억 명에 달하며 현재 추세라면 2057년에 100억 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기후변화로 인한 예측불허의 사태를 고려한다면 언제까지 인간이 지구에 생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모두 당장은 별 문제 없다는 듯 살아갈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본래 근시안적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대극적인 측면을 갖는다. 한 측면은 다양성이 증가해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를 바탕으로 역동적인 사회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므로 다양성을 장려하는 것은 미래의 생존 전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한편 다양성이 증가하면 사람들 간 의견 대립이 빈번해지고 갈등이 증폭되어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대극적인 두 측면을 방치한다면 부정적인 측면(갈등)이 긍정적인 측면(창조성)을 압도하는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관은 고사하고 단지 정치적 견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아니면 재산 규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공감을 바탕으로 원만하게 지내기 지극히 어려운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래서 “대극의 조화(harmony of the opposites)”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픽사베이

필자는 여기서 다양성의 증가에 따른 갈등과 충돌을 완화하는 방법으로 우선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agreeing to disagree)”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얼핏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주관을 가질 고유한 권리가 있으며, 나아가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할 권리도 갖고 있다. 물론 이 모두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진정한 개인주의(true individualism)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면, 이는 곧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이요, 진정한 개인주의 원칙에 충실한 것인 바,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는 그 출발점이다. 필자는 현재 한국사회에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이 원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들과 동의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disagreeing to disagree)”에 해당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견해나 주장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만이 옳다는 독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동의하는 데 동의하기(agreeing to agree)”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다분히 동어반복적인 인상을 주지만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는 어떤 견해에 동의한다고 말한 후 특별한 이유 없이 곧바로 이를 부정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는 “동의하는 데 동의하기”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진정한 동의에 도달한 경우에만 “동의하는 데 동의하기”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대극적인 입장은 “동의하는 데 동의하지 않기(disagreeing to agree)”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자기모순적인 상황이므로 배제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의할 때 우리가 따라야할 자연스러운 과정은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에서 출발하더라도 진지한 토론과 논쟁을 거쳐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 단계에 도달한 후, 일정한 시간을 두고 더 깊은 논의를 통해 “동의하는 데 동의하기”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안에 있어 항상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선호나 감정, 그리고 경험의 차이로 인해 끝까지 이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이슈들에 관한 한 이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이런 논의와 관련해 다음 사례를 생각해보자. 우주만물의 탄생 및 생명의 출현과 관련해 창조론과 진화론이 오랫동안 극단적으로 대립해왔다.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충분한 과학적 근거 없이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편협한 사람들로 매도하는 한편, 진화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신화와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치부한다. 이들은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 단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사람들이 종교와 과학은 각각 고유의 영역이 있으므로 서로 충돌할 이유가 없다면서 서로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을망정 다름을 인정한다면, 이는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나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와 같은 대안적 모델이 제시되었으니 양쪽 모두의 지지를 기대하기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위해서는 우선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 단계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이슈는 기후변화에 따른 존재적 위험이다. 기후변화는 이미 상당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 과학계의 정설이므로, 획기적으로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기 위한 국제 공조의 필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그렇지만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의 생산, 가공 및 유통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는 에너지 기업들과 이들을 비호하는 정치세력은 집요하게 기후변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해 미국이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런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환경오염물질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기업으로 알려진 <코크 인더스트리즈(Koch Industries)>는 공화당에 막대한 자금을 후원해 온 코크 형제(Koch brothers)가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재력을 이용해 기후변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일반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기후변화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도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 단계에 머물고 있으니 앞으로 갈 길이 요원하다.

우리는 수많은 크고 작은 문제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본성과 양육의 차이로 인해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일란성 쌍둥이라 할지라도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 다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은 항상 맞고 상대방은 항상 틀리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한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 단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당면한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한국사회에 대체로 이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런 교착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됨에 따라 마치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 재벌 총수나 기업의 임원 누구를 막론하고 한국사회에서 힘 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좀 더 냉소적으로 말하면 의도적으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가 분열될수록 자신에게는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는 한국사회의 발전과 통합을 위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올해 들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일련의 사건들, 예컨대 일본의 경제보복과 한국정부의 대응, 특정 인물의 법무부장관 인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공방, 과감한 최저임금제의 실행에 따른 공과에 대한 논쟁 등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 단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에너지 낭비는 실로 막대하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닥칠 엄청난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필자는 한국사회에는 깊이 사고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깊이 사고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현재 사고틀(mindset)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행이나 현장 학습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며, 체계적인 독서를 통해 제대로 된 지식을 얻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다. 나아가 인터넷 시대를 십분 활용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전문가나 학자들의 글을 읽거나 유튜브를 통해 이들의 강연이나 인터뷰 동영상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가운데 가짜 뉴스에 의존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그럴듯한 주장에 일방적으로 경도한다면 어떤 의미 있는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단계를 넘어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 단계로 이행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의 이행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는 지극히 어렵지만 두 번째 단계는 조금만 마음을 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내년에는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고대한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지식공유광장(www.iksa.kr) 운영

 <시장경제의 통합적 이해> 외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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