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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법을 처음으로 실행하다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탄신 250주년 특별기획
김남기 | 승인 2012.03.08 16:41

   
 



1801년 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간 茶山은 몇 달 이내에 집에서 보내준 의서(醫書) 여러 권과 한 상자의 약초를 받고 심심풀이로 그 책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묵고 있던 집의 아들이 ‘시골에서는 병들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그래서 듣지 않으면 뱀을 먹어보고, 그래도 듣지 않는 병은 어쩔 수가 없다’ 면서 茶山에게 그  의서(醫書)의 내용을 소개해 주기를 청했다. 그래서 지은 것이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자그마한 의서다.
 
그 책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서문에 의하면 여러 책에서 간단한 것만 골라 40장 정도의 책을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 책에는 약방문만을 기계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약간의 약초(本草)에 대한 소개도 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그가 평소에 기초의학으로서 본초학(本草學)을 중요시한 것과 관련된 생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茶山은 진맥(診脈)에 대해서 비과학적이라며 생각했다. 특히 맥을 짚어 5장6부를 진찰한다는 사고를 배격했다.

‘맥(脈)은 혈기(血氣)의 쇠약하고 왕성함과 병증(病證)의 허(虛)와 실(實)을 살필 수 있는 것인데, 그 왼손의 촌맥(寸脈)은 심장(心臟)을 진찰하고, 오른손의 촌맥은 폐장(肺臟)을 진찰하고, 왼손의 관맥(關脈)은 간담(肝膽)을 진찰하고, 오른손의 관맥은 비위(脾胃)를 진찰하고, 왼손의 척맥(尺脈)은 신장(腎臟)⋅방광(膀胱)⋅대장(大腸)을 진찰하고, 오른손의 척맥은 신장(腎臟)⋅명문(命門)⋅삼초(三焦)⋅소장(小腸)을 진찰한다고 하지만, 이는 망녕된 말이다. ⋅⋅⋅(중략)⋅⋅⋅
그러므로 맥을 진찰하는 것을 배우는 사람은 오직 그것이 힘이 있고 없는가와, 신(神)이 있고 없는가와, 법도(法度)가 있고 없는가만을 살필 뿐이지, 어찌 오장 육부를 잘 분별할 수야 있겠는가. 대저 능히 움직여 능히 손가락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힘이라 이르고, 능히 화합(和合)하여 능히 생활(生活)하는 기관(機關)을 가진 것을 신(神)이라 이르고, 능히 왕래(往來)하고 동작(動作)하고 정지(靜止)하면서 법(法)이 있어 문란하지 않은 것을 법도라 이른다.
이 세 가지를 알고 나서 맥이 부동하고 가라앉음과, 더디고 빠름과, 크고 작음과, 미끄럽고 껄끄러움과, 팽팽하고 허한 것과, 긴장되고 완만함과, 맺히고 잠복하는 징후(徵候)에만 자세히 주의한다면 맥가(脈家)의 할 일은 다 마친 셈인데,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맥론>(脈論)

의학 방면에서 茶山의 최대 업적으로 흔히 손꼽히는 것이 종두법(種痘法)을 처음 실시했다는 것이다. 종두라고 하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우두를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실은 에드워드 제너의 우두법이 영국에서 성공한 것은 1798년쯤이었고, 그 전부터 이미 인두법(人痘法)이란 것이 동서양에서 모두 소규모로 알려져 있었다.

중국에서는 송대에서 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전하는 인두법에는 몇 가지 다른 방식이 있지만, 요컨대 마마의 진물을 솜에 묻혀 코에 넣어 인체에 흡입시켜 예방의 효과를 보려는 방식이다. 제너에 의해 만들어진 우두보다 효과가 없거나 위험한  방식인데, 중국에서는 수백년간 전해지던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茶山이 시험한 듯하다.

<마과회통(麻科會通)>의 끝에는 분명히 제너의 우두법 소개가 있으나, 청나라에서 1828년에 출간된 책을 그대로 베끼기만 했지, 제너의 이름은 커녕 그 책 저자인 피어슨의 이름도 빼버린 채로 되어 있다.

최남선⋅김두종이 지적한 대로 당시는 서학탄압시대였고 정약용 자신이 이 문제에는 극히 조심해야 될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국적 없는 책을 만들어 소개한 것 같다. 따라서 그 자신이 우두법을 실시했는지의 여부가 분명치는 않다.

다만 이규경(李圭景)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그가 우두를 실행까지 했었음을 짐작할 수는 있을 성싶다. 여하튼 정약용에 의해 소개된 우두는 계속 시행되지 못한 채 1880년 이후 지석영(池錫永)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수입하게 된다.

茶山이 왜 그리 열심히 천연두 예방 기술의 도입에 애를 썼을까? 이용후생의 실학 정신에 투철한 때문이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6남 3녀를 낳았으나 그 중 4남 2녀는 어려서 죽었는데 대부분이 천연두로 요절했으며, 선생 자신도 어렸을 때 천연두로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다.
/다산교육문화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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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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