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서정의 글우물]

[청년칼럼=허서정] “오늘 숙제하셨어요?” 옆자리 동료에게 묻자 겸연쩍은 웃음이 돌아왔다. 5개월 전 30대 직장인 A씨는 친한 동기 한 명과 함께 어학원을 방문했다. 영어로 말하고 싶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 회화 수업 등록은 자격제였다. 먼저 문법 강좌를 수강하고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문법은 지루하고 어려웠다. 삼 개월 과정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어쩌다 한번 학원을 빠지고 나니 두세 번은 쉬웠다. 집으로 퇴근해서 외투를 벗어던지며 치킨 주문하던 때가 그리웠다. 

어느새 2020년이 코앞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는 발 빠르게 내년을 요약하는 키워드를 내놓았다. 그중 하나가 ‘업글인간’이다. 이들은 성공보다 성장을 목표하며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신봉한다. 비좁은 성공 관문을 뚫는 스펙 쌓기가 아니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 매일의 성장이 중요하다. 묻고 싶다. 치킨은 소확행인가, 성장인가?

Ⓒ픽사베이

2018년 대한민국 소비 트렌드이자 유행어 1위였던 소확행은 시사상식사전에도 올라 있다. 유래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에세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뜯어 먹거나, 새로 산 셔츠에서 풍기는 깨끗한 면 냄새를 맡을 때 느끼는 사소한 행복을 얘기한다. 비슷한 뜻을 갖는 다른 나라 말로 스웨덴에 ‘라곰(lagom)’, 덴마크와 프랑스에는 각각 ‘휘게(hygge), ‘오캄(au calme)’이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가치는 편안한 심신·소박한 일상·한적하고 균형 잡힌 삶·공동체와의 조화다. 한국에선 일상적으로 찾아보기 드문 모습이다.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순간에 의존한다. 삶을 수식하기엔 이질적이란 이야기다. 

단순히 라이프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소확행이 급부상한 2018년 KOSIS(국가통계포털)에 의하면 노르웨이는 GDP 8만 1,807.2달러로 3위를 기록했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대표 4개국도 10위권이다. 한국은 1인당 3만 3,346.3달러로 26위였다. 2019년에는 팔마비율(처분가능소득 기준)로 OECD 36개국 가운데 30위를 기록하면서 빈부격차가 큰 국가군에 포함됐다. 고용지표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다지만 개선 여부는 불분명하다. 채용 인원에 한계가 있는 공공부분 일자리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민간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얼어붙었고 청년실업률 역시 여전히 한파다. 

경제 지표만 그럴까. 한국개발연구원이 진행한 국민 행복지표 개발 연구 과정에서 성인 20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국민의 20%는 행복 취약계층이라고 한다. 인간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의식주는 또 어떤가. 우리는 영화 ‘기생충’에서 주인공 가족이 살던, 볕도 안 드는 지하 단칸방을 기억한다. 올해 초 서울 용산구 26년 된 8평짜리 다세대주택이 8억을 훌쩍 넘는 가격에 거래됐다. ‘지·옥·고’ 중 하나라는 반지하방이다. 정신과 의사 출신 작가인 프랑수아 를로르의 소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보면: 주인공 꾸뻬 씨가 열한 번째 배움을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이다.” 21세기 한국식으로는 작은 텃밭이 딸린 단독주택 되시겠다. 매매가는 상상에 맡긴다. 

수많은 통계수치와 국민들의 체감 인생 난이도로 미루어볼 때 한국이 헬조선이라는 오명을 벗을 길은 요원하다. 90년대생 기준 조부모님 시절엔 소 팔아 대학을 보내면 자식은 괜찮은 직장에 취직했다. 부지런히 벌면 내 집 마련도 실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연애, 결혼, 출산은 물론 집과 인간관계, 꿈, 희망, 마지막으로 목숨마저 포기한다는 8포 세대가 등장했다. 주거는 삶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투기꾼이 판치는 도박장으로 전락했고 SNS에는 껍데기뿐인 자랑이 가득하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무슨 미래를 내다보며 저축은 왜 하나. 요즈음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거침없이 소비한다. 오늘을 살고 돈이 떨어지면 곧 노동 현장으로 복귀한다. 

벼룩시장구인구직이 직장인 2013명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94.6%가 ‘월급고개’를 겪어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월급고개란, 월급을 다음 월급일 전에 모두 소진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릿고개에 빗댄 단어다. 주요 지출 항목 중 취미활동 및 자기계발비는 없었다. 생활비와 주거비, 대출이자와 보험료에 이어 8.9%로 비교적 높은 비용이 외식비였다. 지난 10월 배달 앱 ‘배달의민족’이 추가한 ‘총 주문금액 조회’ 기능은 이용자들이 대거 몰려 서비스가 중지되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인증샷의 주문금액은 적게는 10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에 이르렀다. 최고가는 1억 7,320만여 원으로 먹방 유튜버 밴쯔가 달성했다. (밴쯔의 경우는 사업 투자금액으로 치더라도) 이런 규모를 ‘소소한’ 행복이라고 보기 어렵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혹시 돈이 모자란 건 아닌지 확인해보라는 말이 있다. 의미심장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입장으로는 돈이 생기면 먹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가성비가 뛰어난 행복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면 목돈을 쓴다. 성공은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고 나를 성장시키자니 품이 많이 든다. 

성장은 유의미한 변화다. 어제 1인 1닭을 했는데 오늘 반 마리를 더 먹은 건 성장이 아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본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패했을 때 웅크리고 들어앉을 집도 필요하다. 무직일 동안 굶어 죽지 않으려면 현금자산도 필요하다. 기본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 생존 외적인 부분에 매달리는 건 현실이 발목 잡은 결과다. 꿩 대신 닭이고 성적에 맞춘 하향지원이다. 한번 잘못 넘어지면 재도전이 불가능하니 안전하고 확실한 길만 고른다. 소확행은 개천 행복설과 궤를 같이하는 현실 순응론이다. 

소확행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유행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말을 기능성 화장품과 여행 패키지와 의류 쇼핑몰 광고에 무분별하게 붙이지는 말아 달라. 그 행복이 소소하든 원대하든 개인의 선택이다. 트렌드가 전부를 대변할 수 없다. 아, 한국에서 크고 불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소확행 식으로 줄여보니 싸늘하다. ‘대불행’이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준말은 준말일 뿐이니까.

허서정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기고자 펜을 듭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