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영인의 정화수]

[오피니언타임스=도영인]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만하면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나이가 90살이 넘어서도, 언제라도 이 삶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산다면 아직 체험해보지 못한 삶의 기쁨을 맛보려는 인간적인 욕구에 스스로를 묶어 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몸이 필요로 하는 만큼만 먹을 줄 아는 하등동물과 달리 인간은 위가 충분히 채워진 후에도 과식할 수 있는 탐욕의 동물이다. 신체가 보내는 신호와는 상관없이 아직 더 먹고 싶다는 느낌 내지, 배는 부르지만 귀한 음식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과식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더군다나 여러 가지 이름 모를 심리적인 욕구불만을 음식으로 채우려 하다 보면 과체중으로 건강을 위협하는 상태를 초래하기도 한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자기통제가 안되는 인간들은 아직까지 고등동물 아닌 고등동물임에 틀림없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 보통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답을 내놓을 수 있다. 생애주기에 따라서 다양한 삶의 목적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휩싸여서 혼신을 다하느라 삶의 목적이 달리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어느 생애주기에 속하든 누구나 행복하다는 생각과 기분 좋은 느낌을 체험하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삶의 목적이 무엇이든지간에 사람들은 만족스럽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 살고 그런 느낌이 들 때 자기인생에서 성공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만족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살이가 녹녹치 않다는 것을 가능하면 어른이 되기 전부터 일찌감치 배워야 한다. 어릴 때 입 속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 맛처럼 인생 모든 다반사가 술술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는다. 원하는 만큼 아이스크림을 맘껏 먹으라고 내버려두는 부모가 없듯이 이 세상은 어릴 때부터 교육이나 제반 사회제도를 통해서 자기통제 습관을 키우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이들이건 어른이건 충동적 행동이라는 장애물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할 때 결국 보다 큰 삶의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혼자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 또는 다른 사람과 약간의 행복감이라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필자와 같은 일반인 수준을 능가하는 성인이거나 궁극의 지혜를 깨달은 구루(guru)일 것이다. 자기수행을 위해 금식, 체벌 등 일부러 고행의 길을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평범한 사람들은 적어도 일반적인 수준의 행복감을 체험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어릴 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어른이 되어 성실하게 일하여 돈 벌고 아이들 키우면서,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은 적어도 불행한 삶을 살기 원치 않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인간의 동기부여에 관한 이론에서 인간욕구의 위계질서를 설명한 심리학교수로 유명한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이 가진 욕구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궁극적인 욕구를 자아실현욕구(self-actualization needs)로 보았다. 인간이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동물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신체가 필요로 하는 음식, 물, 온기, 주거, 옷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가족이나 단체생활을 통한 안정감과 소속감,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존경으로 인한 자아존중감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인간적인 욕구들은 대부분 내면적이고 외형적인 삶 속에서 자아통제 습관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 다행히 심리적이거나 물질적인 면에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면, 좋은 학벌, 고액의 연봉과 사회적 지위, 훌륭한 배우자, 쾌적한 집 등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만하면 되었지~ 하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자아정체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모든 외형적인 조건들이 개인의 삶에서 만족할 만한 삶의 패턴을 선사했다 하더라도, 누구나 다 겉모습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미묘한 의식 상태에 놓일 수 있다. 동물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는 불만족감은 보다 높은 의식수준의 삶을 지향하는 자아실현의 욕구에 기인한다. 모든 낮은 수준의 욕구를 충족한 후에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만이 느끼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고 하등동물이 이루진 못한 문명세계를 이루어 왔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내 모습이 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인간욕구는 물질문명이 가져 온 모든 혜택을 누리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자만심으로 자신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는 정신적인 나태함을 당연시하게 되면 무엇이라 이름지울 수 없는 불만감, 우울증, 어딘가 아픈 것 같은 정체모를 느낌, 혹은 심리적 병리상태로 떨어지기 쉽다. 더 심한 경우에는 타인을 착취하거나 얕보고 자신을 속이는, 부패하고 하등한 자기중심적인 삶의 패턴으로 추락하게 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높은 수준의 자아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기기만의 늪에 빠진 채 인간으로서 가능한 최상수준의 행복감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기본적인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고, 극심한 물질적인 결핍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에 몸담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빈곤과 독재를 거의 다 극복하였고, 그냥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감 내지,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현존감 욕구(being needs)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여유 있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물질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훨씬 더 윤택한 생활수준과 비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경우에 가능한 일이다. 지나친 물질적인 탐욕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누구나 다 내가 가진 잠재성, 숨겨진 재능,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내 삶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을 추구하고 싶은 나만의 고유한 자아실현의 욕구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다.

이제 한국인들은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갈등을 없애고 사회통합을 이루고, 다양한 생각들을 존중하여 공동선을 나눌 수 있는지, 어떻게 최대 다수를 위한 공익을 극대화할지, 대립을 극복하고 합일점을 찾아 더 큰 행복감을 누리기 위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천민자본주의의 본거지인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 2000년대에 들어 가장 싼 유형의 자가용비행기 제작이 급격히 줄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자본주의 혜택을 극대화한 억만장자들이 너도 나도 가장 비싼 최고급 자가용비행기 주문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백억 재산을 가진 한국기업가들이 천억 재산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삶의 만족도는 계속 밑바닥에 머물 수밖에 없다. 열심히 노력하여 소위 ‘졸부’로서 사회경제적인 지위를 획득하였건, 필자처럼 그냥 굶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게 소박한 노년을 누리고 있건, 이제 이만하면 나는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자문해야 할 때이다.

필자는 주변사람들과 함께 다가오는 새해 2020년에는 궁극적인 자아실현을 위해 좀 더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들의 대열에 낄 생각이다. 크고 작은 모임들을 통해 미약하나마 내 개인의 삶 속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자아실현이 무엇인지, 남녀노소 모두 함께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려 한다. 그러다보면 죽음의 순간이 언제 다가와도 괜찮을 것 같다.

도영인

한 영성코칭연구소장
영성과 보건복지학회 고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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