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의 글로 보다]

[청년칼럼=김동진]   2011년 봄, 트위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우연히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김진숙이라는 이름도 낯설었고 한진중공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다만, 무엇이 한 사람을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가게 만들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그 절박한 마음이 대체 뭘까 궁금했다. 정부는, 사람들은 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볼 생각조차 안 하는 지에 대해서도.

그러다가 희망버스 이야기를 들었다.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과 크레인 위의 김 지도위원과 연대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부산 영도로 온다고 했다. 멀리서도 온다는 데 부산에 살면서 안 가본다는 것이 괜히 미안해서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 친구와 함께 영도로 향했다. 오후쯤에 도착해서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정문 입구에 모여 집회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몰려들었다. 원래 계획은 공장 안으로 진입해서 해고 노동자들도 만나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 중인 크레인 밑에 모여서 응원과 지지의 목소리를 올려보내는 것이었다. 경찰이 공장으로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가 계속 흘러나왔고 밤이 깊어가도 진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야 하나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기적처럼 담벼락 위에서 사다리가 내려왔다. 담장 안의 노동자들이 다급하게 빨리 올라오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우루루 몰려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겁이 많은 여자친구는 사다리 타는 것이 무섭다고 했고 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사다리까지 내려왔는데 그냥 발길을 돌리면 후회할 것 같아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조심 사다리를 타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픽사베이

공장 안에 들어가서 김 지도위원이 올라간 크레인 밑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노동자들이 마련해 준 음식을 먹고 이 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김 지도위원은 왜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했는지 울분에 찬 목소리들을 들었다. 연신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김 지도위원을 향해 함께 손을 흔들고 목소리 높여 응원의 목소리를 하늘로 올려보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이 됐고 사람들은 곳곳에서 잠을 청하거나 밤을 새울 준비를 했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여기서 아침을 맞이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장 밖으로 나간다는 소리에 따라나섰다. 나갈 때 보니 무리 중에 백발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백기완 선생이 계셨다.

해 뜰 무렵 집에 들어가 자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한진중공업 안에 있냐고 물었다. 트위터에 올린 글과 사진을 보고 연락한 모양이었다. 새벽에 나와서 지금은 집이라고 대답하자 친구는 어제 공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고립돼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괜히 배신자(?)가 되어 집에 와서 편하게 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내 공장 안의 사람들이 무사히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 이후 종종 한진중공업 앞 인도에 앉아 크레인을 멍하니 쳐다보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얼마 후 여름에 2차 희망버스가 전국에서 출발했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부산역에 모여 집회를 하고 영도까지 행진한다고 했다. 경찰이 행진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행진이 시작되자 예상과는 달리 경찰은 전혀 통제를 하지 않았다. 도로는 어느새 우비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두 차로만 차량을 통제하고 행진을 허용했다면 좀 불편하긴 해도 차량 통행은 가능했을텐데 경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행진을 하면서 이대로라면 저번처럼 공장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더라도 크레인이 보이는 공장 앞까지는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찰은 도로 한 가운데 시위진압 차량으로 벽을 세우고 통행을 전면 금지시켰다. 조금만 더가면 크레인을 볼 수 있는데, 멀리서나마 손을 흔드는 김 지도위원에게 응원의 함성을 보낼 수 있는데 견고한 벽은 끝내 뚫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계속 진입을 시도했지만 경찰은 물대포를 쏘아댔다. 최루액이 섞여있어 물줄기를 피해 도망치면서 연신 기침이 쏟아져나왔다. 벽 사이의 좁은 틈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려 하자 전경들이 최루액을 분사했다. 사람들의 진입을 막기 위한 위협용이라기엔 너무 위험하게 얼굴 쪽을 겨냥해서 분사했다. 그때 웃으며 최루액을 쏘아대던 한 전경의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원한 건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크레인 위의 김 지도위원에게 전하고 싶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어서 빨리 땅으로 무사히 내려오라고. 단지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새벽부터 버스 타고, 퍼붓는 비를 맞고 걸어온 사람들이 오도가도 못한 채 길 위에서 최루액 섞인 물대포를 맞고 있었다. 최루액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눈물이 흘러 나왔다. 너무 화가 났고 억울했다. 무력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경찰은 이 집회는 불법이니 해산하라는 방송을 계속했다. 나야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전국에서 모여든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해산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 벽을 뚫고 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 그것 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때의 답답함과 억울함, 알 수 없는 분노를 떠올리면 지금도 울컥하는 마음이 쉽게 달래지지 않는다.

며칠 전 암투병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이 대구까지 걸어서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구 영남대 의료원 옥상에서 6개월 가까이 고공농성 중인 친구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돕기 위해서라고 한다. 2011년 당시 김 지도위원은 309일 만에 땅으로 내려왔다.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옥상으로, 굴뚝으로,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10년 만의 복직을 앞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복직은 또 다시 무산됐다. 10년의 시간동안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사람 때문에 절망하지만, 또 사람 때문에 위안을 얻는다. 결국 믿을 건 사람 뿐이다. 새해엔 억울함과 답답함과 분노의 마음이 사라지고 희망과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를 빌어본다.

김동진

한때 배고픈 영화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들 독서수업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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