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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딜레마적 보고서[임종건의 드라이펜]
임종건 | 승인 2020.01.06 11:00

[논객닷컴=임종건] 1월 1일 북한의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 관영 매체들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노동당 중앙위 제7기 제5차 전원회의 보고에는 북한이 처한 자기모순적인 곤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집권 후 매년 1월 1일 육성의 신년사를 통해서 전년도를 회고하고 새해의 시정 방향을 제시했는데 올해는 그것을 이 보고서로 대신했다.

보고서의 요점은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을 성공시켜 경제개발을 하려 했으나 미국의 본심이 협상하는 척하며 북한을 고사시키려는 것임을 알게 됐다는 것과, 따라서 ‘적대세력의 경제제재 속에서 살아야 함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니 주민들은 고생을 각오하라는 것이다.

그는 “적대세력은 우리가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를 보게 될 것”이고, “충격적인 실제행동에 나설 것”이라며 개발 중인 신형 전략무기들로 도발하겠다는 엄포를 잊지 않았다. 2018년 4월 남북과 북미 간의 대화 무드 상황에서 열렸던 전원회의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및 핵실험 중단 결정을 백지화하겠다는 뜻이다.

Ⓒ청와대

그는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의 목적에 대해 “우리 인민이 당한 고통과 억제된 발전의 대가를 한꺼번에 받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손해란 북한이 온 세계가 반대하는 핵무기 개발로 자초한 것이다.

그에 대한 보상을 그들이 핵무기 협박을 일삼았던 상대로부터 받겠다니 그런 적반하장도 없다. 하지만 세계평화와 고통받는 북한 주민을 해방하기 위한 것인 만큼 어떤 난관이 있다한들 비핵화 협상은 해야 한다.

그가 만약 비핵화 협상을 통해 핵과 경제개발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면 그에겐 ‘꿩도 먹고, 알도 먹는’ 대박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다. 어느 한쪽만 이득을 보는 협상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관련해 “경제건설에는 유리한 대외환경이 절실하나 목숨같이 지켜온 존엄을 팔수는 없다”, “가시적 경제성과와 복락만을 보고 미래의 안전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잘 살기를 포기하더라도 핵무기는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핵화협상의 교착점이기도 하다. 김정은의 선의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비핵화 의지에 진정성이 있다고 보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후자들은 보고서의 이같은 발언을 보고 ‘역시나’를 되뇔 것이다.

북한은 하노이 노딜회담 이후 “연말 안에 ‘새로운 계산법’을 내놓으라”고 제멋대로 시한을 설정해 미국을 다그쳤다. 단계적 비핵화와 보상 방안을 수용하라는 북측의 요구에, 미국은 핵무기 폐기가 먼저라고 맞섰다. 미국이 아무런 새 계산법을 내지 않은 채 연말시한은 지났다.

김정은이 전원회의를 나흘씩이나 연장하며 연말 마지막 날까지 개최한 것은 미국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기다린 심리적인 초조감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히려 미국이 연말 시한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전전긍긍했다고 역공했다.

그가 엄포한대로 대미 적대행동에 나설지는 두고 볼 일이나, 일단 미국의 대북 입장에 따라 대결의 강도는 조정될 수 있다고 협상의 여지는 열어두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을 믿는다고 유화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미북 간의 신뢰가 깨질 경우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정치 경제 외교 군사적으로 다양한 선택수단이 있는 미국과 달리 미사일 발사밖에 없는 김정은에겐 더 큰 부담이다. 핵무기를 완성하면 강대국이 된다고 큰소리 친 처지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면목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조미관계는 불가피하게 장기성을 띠게 되었다. 자력갱생만이 살길이다. 제재해제를 기다려 자강력을 키우지 않으면 반동세력의 공세만 거세질 것이다” 였다. 그는 보고서에서 ‘자력’이란 말을 20번, ‘정면돌파’를 23번이나 썼다.

김정은이 내놓은 1950년대 ‘천리마운동시절’ 처방이 제대로 먹힐 것 같지도 않다. “혁명적 사상은 시대를 앞서 가야하나, 경제는 현실에 발을 딛고 진행해야 한다.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말로만하지 과거의 타성에서 탈피하지 못해 혁신이 미흡하다”는 그의 말은 북한의 통제경제 실상에 대한 귀띔이다.

보고서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북남’관계는 일언반구도 없이 ‘조미’관계만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작년 신년사의 서두에서 “희망의 꿈을 안고 2019년을 맞는다”고 했을 만큼 남북관계는 2019년 신년사의 주제어였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이 작년 내내 자신의 입으로, 또는 휘하의 관리들을 통해서 온갖 막말로 문 대통령을 조롱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처사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트럼프에 대한 개인적 비방을 하지 않은 것과도 대조된다.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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